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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2.1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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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칼럼위원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7시간, 7시간이면 늘어지게 잔 잠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잠이 고프다. 웬 놈의 잠이 왜 이리 쏟아지는 것일까. 어려서도 그랬다. 그래서 외숙모에게 잠이 많아 죽겠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를 닮은 모양이구나. 외할아버지가 점심만 잡수셨다 하면 건넌방 문설주에 기대어 조셨어.”

그럴까? 왜 외할아버지의 잠 유전자가 나한테만 폭포가 되어 은총인 양 쏟아졌을까. 외할아버지의 자손들 그 누구도 잠이 많아 죽을 지경이란 말은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외삼촌 형제와 이모들, 그리고 외사촌이나 이종사촌이나 나의 형제들 하나 빼지 않고 찾아보았건만 유독 나만 그렇다.

하루 열 잔 넘게 커피를 마셔도 눕기만 하면 잠은 폭포가 되어 쏟아진다. 금방 커피를 마시고 누워도 잠은 온다.

남들은 말한다. 잠을 잘 잘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고.

천만의 말씀. 대개 하루 여덟 시간만 자면 수면은 충분하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의 1/3이 잠으로 소모되고 2/3는 자기 활동의 시간이라지만 나는 아니다. 2/3는 잠자야 하고 1/3만 살아있는 시간이다. 1/3로 남들과 경쟁을 하자니 코피가 한참 나야 한다.

잠을 이겨야 한다. 잠을 이기기 위하여 초저녁부터 열심히 일하고 자정 지나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역 때는 그리하였지만 퇴물이 된 지금은 그렇게 애쓸 필요조차 없다. 가급적이면 편히 쉬는 게 퇴물의 역할이다.

남들은 잠에서 부자 되는 꿈을 꾼다지만 나는 그런 꿈 한 번 꾸어 보지도 못했다. 거기다 프로이드는 꿈에서 정신병의 근원을 찾아내 유명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가 되기도 했고, 돈도 적잖이 번 모양이지만 잠 많은 나는 뭔 재수가 옴 붙었는지 아무것도 안 된다.

내 잠은 저녁형 새벽형 불문하고 쏟아지는 것인지, 저녁잠을 자고도 새벽잠을 못 자는 날이면 아무리 잠을 많이 잤다 해도 파리버섯 먹은 병아리마냥 꼬박꼬박 졸아 하루 종일 힘을 쓰지 못한다. 특히 밤잠을 아무리 많이 잤어도 새벽 동틀 무렵 한 잠을 달게 자고 나야 하루가 개운하다. 이런 내가 부지런할 리 없다. 매일 뒤지고 남보다 한두 발 뒤떨어져 남의 신세지는 게 다반사다.

거기다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음치에다, 수영은 물론 기계체조, 달리기, 넓이뛰기, 높이뛰기, 마라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몸치, 글씨 또한 그렇다. 누구를 닮았는지, 잔뜩 옴츠러든 글씨는 평생 핀잔만 받았으니 가히 알아줄 만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온 게 이상하고, 문인협회 지부장이나 예총 지회장을 한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거기다 수필을 쓰고 수필 강의를 한다니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다시 따져보자. 나의 잠이 천성적이라지만 외상에 의한 상처는 없는가. 아니면 질병으로 인한 약물 중독에 의한 것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있긴 있다. 십여 년 전 대상포진을 모질게 앓았다. 남들은 어깨, , 허리, 다리라고 하던데 나는 얼굴이다. 오른쪽 눈 밑, 광대뼈와 그 근처, 상악골이다. 이 부근의 근육을 지나는 신경계를 삼차 신경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대상포진으로 인한 삼차신경통은 무지 아팠다.

통증이 오는 날이면 아무것도 못 한다.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꼼짝 말아라다. 내 몸 어디에서 이렇듯 어마어마한 전기가 쏟아져 나왔던가. 수십만 kw의 전력이 광대뼈 부근 머릿속에서 무시무시한 전기충돌이 일어난다. 번갯불이 날카롭게 질주하고 뼈는 산산이 쪼개지며 부서지고 깨진다.

나의 오른쪽 얼굴은 이미 내 얼굴이 아니다. 완전히 초토화된 전쟁터. 이 천지개벽으로 박살난 나의 상악골은 불수의근. 상악골에 연결된 오른쪽 어금니와 송곳니를 비롯한 모든 차아가 제맘대로 놀기 시작한다. 혀가 아랫니에 맴도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깨물어 버렸으니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아우성이다. 아아, 혀를 물다니. 삽시간에 넝마가 된 나의 혀. , . 3년이 지난 지금도 아프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고 우리나라 굴지의 병원에서 십년이 넘도록 치료 중이다. 약 이름이 뉴론틴, 센시발, 리보트릴, 초창기에는 의료보험이 안 돼 꽤 비쌌던 모양이다. 그래도 의료혜택이 되어 싼값에 복용 중이다. 혹시 이 약 때문에 졸린 것은 아닌가 하여 약을 줄였다. 약 분량의 2/3. 그 의사 과감한 데가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그것도 그리 효험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때 동네에 미친 사람이 있었다. 그 광인이 병원에 몇 번 끌려 가고 오고를 몇 번 하고 난 뒤 할머니가 요즘 어때하고 물으시면 병원 약을 먹으면 왜 그리 졸린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약이 고약하긴 고약하다. 졸릴 뿐만 아니라 어지럼증까지 오니까. 그런 내용을 약과 동봉된 투약방법 설명서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죽기 전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모양인지. 따라서 내 졸음 증상은 쉽게 고쳐질 병이 아니다. 졸음을 없애자니 약을 끊어야 하고 약을 끊자니 삼차신경통이 반기를 들고.

세상 살아가는 사람 누군들 지독한 병 하나 안 가진 사람 있을까? 그러나 제발 대상포진에는 걸릴 일이 아니다. 다행히 통증클리닉이란 게 생겨났으니 망정이지, 이것이 없었던 과거는 어떠했을까.

처음 통증클리닉이 생겼을 때 사람이 병에 걸리면 대강 아프고 견디며 살아내는 게 인생 아니냐고 개탄한 적이 있는데, 이젠 아니다. 그게 없으면 나는 죽는다.

쏟아지는 나의 잠이여.

나는 잠 속에서 프랜시스 잠, 폴 엘르아르, 라이나 마리아 릴케를 읊고, 로댕, 까미유, 호앙 미로, 샤갈, 르느아르, 몬드리안의 색깔로 잠의 장벽을 칠하고, 가스통 바슐라르, 앙리 보스꼬, 우나무노, 알퐁스 도데의 환상의 숲을 걸으리라.

오오, 모래알처럼 쏟아지는 나의 잠이여, 나의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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