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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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 이상국
  • 승인 2019.12.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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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중국에 다녀왔다.

중국과 나의 첫 대면은 산뜻했다. 우리나라 도시마다 상점마다 영문 간판에 멀미를 내던 나에겐 신선한 하루 하루였다. 어쩌면 이렇게 영문자 한 자 없는 도시가 있을까. 오로지 자기 나라 글자만을 사용하는 나라. 자고로 제대로 된 나라,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그 정도 자기

나라 글을 사랑하고 자랑할 줄은 알아야지. 아시아의 모든 국가, 도시, 빌딩, 아파트, 대형마트, 상점 모두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미친 듯이 영어를 쓴다.

어느 곳이나 영어는 여름철 잡초처럼 끊임없이 피어나고 있다. 태국, 필리핀, 베트남. 그 중 가장 두드러진 나라는 단연 대한민국.

배달된 수필집 한 권에 수록된 40여 편의 글 중 영어제목이 5. ‘긴기니아’, ‘라즈벡’, ‘아리안 툼’, ‘맹그로브’, ‘마추피추’. 이 중 맹그로브, 마추피추는 유추해석이 가능하지만 긴기니아, 라즈벡, 아리안 툼은 도대체 뭔지.

요즘 수필가들도 매끈한 영어 단어 한두 개 끼지 않으면 대우받지 못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적어도 시대에 앞서거나 세련된 수필가가 되기 위하여 거침없이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주에서 세종대왕 탄신 기념 한글 휘호대회가 매년 열린다. 이 행사는 순수 우리 시를 한글로만 써야 하는 붓글씨 대회다. 따라서 오직 여주시에서만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행사다.

아름다운 날이다. 그 흔한 영어 한 자 끼어들 여지가 없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한문마저 여기선 어림도 없다. 마치 해맑은 어린이들이 뛰어 노는 것만 같고, 청년 선비들이 용모 단정히 낭랑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우리 시를 낭송하는 것만 같다. 훈민가, 누항사, 윤동주, 소월, 목월, 백석, 상화, 김수영.

그러나 그건 일 년에 단 하루뿐, 아파트, 고층 빌딩, 길거리에 펄럭이는 플래카드에도 영어 한 구절 빠지면 절단 나는 줄 아는 나라. 말조차 영어가 상용화되어 가스, 라이터, 럭비, 나일론, 넥타이, 라디오, 텔레비전, 안테나, 마이크, 테니스, 잉크, , 스타킹, 샴푸, 보이 스카우트, 와이셔츠, 엔진, 버스, 택시, 크림, 파티, 카메라, 힌트. 가끔 나의 스마트폰은 영어 단어, 신조어 찾느라 하루해를 보내기도 한다.

이젠 낚시 장소로 유명세를 타는 피넛 교란 다리도 생겼다. 아예 ‘peanut 라고 쓰든지. 왜 그걸 한글로 피넛 교라 썼는지. 한글이 영어와 한문을 알기 쉽게 표기하는 기호 가치밖에 안 되는지.

30여 년 전, 어느 교수가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다고 했다. 몽고의 침입, 왜란, , 여진의 출몰, 당의 침입, 한과의 교역 등으로 우리는 충분히 혼혈된 민족이다. 민족 간에 상충하는 뚜렷한 표징이 없어 단일 민족이라 고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강의가 끝난 뒤 청년 몇 명이 교수를 에워싸고 항의한 적이 있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 단군의 피를 이어 받은 단일민족이란 긍지를 갖고 살아 왔다. 왜 단일 민족이 아닌가? 그 항의는 꽤 거칠어서 몇 시간 동안 토론의 토론을 거듭한 바 있다. 적어도 이런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국민이다. 그런데 겨우 1세대도 지나지 않아 이게 무슨 꼴이냐.

몇 년 전 찌아찌아 부족에게 한글을 국어로 사용하게 한 세계적 안목도 무시한 채 자기 나라 글 자기 나라 국어를 멸시하는 이 민족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한글처럼 서러운 글도 없다. 한글 어휘에서 명사는 거의 한문이다. 당장 헌법 전문만 읽더라도 태반이 한문이고 한글은 토씨 몇 개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말로 글을 쓴다는 것은 토씨를 어찌 쓰는가에 달려있다고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이 지적한 바 있다. 우리 글의 모든 명사는 한문이며 영어가 우세인 현금에는 중요대목은 영어가 메우고 다시 중국 대세론이 대두되니 우리 자손들은 잊었다 싶은 한문책 다시 펴 들고 중국말을 배워야 한다.

중국에서 영어 한 자 없는 간판들을 들추며 자존심 강한 나라가 중국이라고 칭찬했더니 누군가 중국도 밀려드는 국제화시대에 발맞추어 발 빠르게 영어 붐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하긴 그렇다. 중국은 공산 국가로 영국이나 미국인이 들어올 일 없으며 영어를 배워야 할 필요조차 없는 나라다. 왜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내가 잘못 알았나. 그런데 옆에 있던 친구, 일본이 그렇대요. 왜 우리가 영어 간판을 써야 해. 미국인이 필요하다면 일본말을 배워서 읽어 보던가. 우리가 왜?

그런 걸 보면 우리는 한참 못났다. 자존심도 사라졌고 긍지도 버렸다. 향후 사라질 언어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경제 대국 몇 개국만 남고 세계 언어는 사라지는 중이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나라 말 버리고 남의 나라 말 쓰다 보면 알게 모르게 그 나라에 종속되고 스스로 종이 되나니.

대중식당에서 밥 먹는 외국인이 한 명도 없건만 식기 반납 창구엔 ‘self desk’, ‘take out’, 계산대엔 ‘cashier’,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 사람이 운전하고 우리나라 사람만 타는 자동차조차 죽어도 한글 한 글자 없다. 오로지 영어, 영어뿐이다. 제 나라 제 땅에서 제 나라 글, 한글도 안 쓰는 한국인, 한글도 못 쓰는 한국인.

여기 한국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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