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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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기차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11.2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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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기차의 마지막 칸 마지막 문을 열고 달리는 기차에 기대어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철길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언제나 기차를 타면 마지막 칸에 올랐고 마지막 문을 열고 사라지는 철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일생에서 가장 긴 기차를 미국 여행 중에 보았다. 콜로라도를 지나 어느 사막에서였던가. 가이드가 탄성을 질렀다.

내가 좋아하는 기차! 동과 서를 잇는 통쾌한 기차!

적어도 100량 이상 화물칸을 달고 달리는 기차! 무릇 기차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리!”

일행은 모두 끝 간 데 없이 잇고 이어 달리는 길고 긴 기차를 바라보았다. 과연 끝이 없었다. 얼마나 되나 한 칸 한 칸 세기 시작했다.

아흔여섯, 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 백하나,… …아 잊었다. 길고 긴 열차칸을 세다 깜빡 무슨 생각을 했던가. 잊고 말았다.

“124!”

마침내 쏘아 올린 여자의 목소리.

과연 길었다. 그 긴 열차에 도대체 무엇을 싣고 달리는 건지. 저 많은 물량은 어디서 소모하는 것이며 과연 그것을 몽땅 소모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많은 물량을 소모하는 광활한 나라. 그 길고 긴 화물열차의 꼬리의 꼬리를 문 화물칸 숫자에 놀랐다.

기차에 관한 기억이라면 공군에 입대하여 훈련기간 중 금요일 저녁에 나가 일요일 밤에 들어오는 특박特泊이란 휴가를 받아 집에 왔던 때의 기억이다. 나에겐 기차가 낯설었다. 여주에서 인근 대도시라면 원주와 서울이다. 이 두 곳 중 여주와 연결된 기차노선은 없다. 옛날엔 수원과 연결된 수여선이란 협궤 열차가 있었다는데 나에겐 기억조차 없다. 그 흔적으로 능서면에 열차가 다니던 철도부지가 높게 쌓여져 풍납 토성과 비슷해 여기가 역사적 격전지라도 된 일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할 정도 였다. 그리고 그 길은 다시 경강선의 철도부지가 되어 하루 몇 차례씩 다니는 4량짜리 경전철의 노선이 되었다.

그런 촌놈이 학교에서 수학여행 갈 때 겨우 한 번 타보는 게 기차였으니 여간 생소하지 않았다. 공군 훈련병이 되어 기차에 오르면 무조건 3등 열차다. 3등 열차의 풍경은 살벌했다. 어린 애들이 울며 보채고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리 밀고 저리 밀리며 아우성을 치는가 하면 나 같은 졸병 군인은 어디 발붙일 장소조차 없었다. 장소가 비좁고 어찌나 고단했던지 의자 등받이를 타고 올라 머리 위 시렁에 누워 잠들었다. 하여튼 무지하게 고단했다. 그런 병사가 나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시렁 위에 누운 병사들이 꽤 있었다. 그래도 그 아래 의자의 젊은 청춘은 아름다웠다. 그 가을, 구르몽의 시를 읊는 대학생 한 쌍은 점등된 객차 안의 낭만이었다.

최근에 천안까지 간 일이 있다. 그런데 탈 때나 내릴 때나 검표를 안 했다. 하 수상해 왜 검표를 안 하는지 따지고 물었다. 요즘 PDA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검표를 안 해도 무임승차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답이다. 하긴 그렇다. 하이패스나, 톨게이트 무인 시스템, 컴퓨터의 매크로, 버스, 전철 요금의 카드화 등 모두 전산화되는 판국에 기차 승객 관리만 구식을 고집하란 법은 없다. 그때 인간을 믿고 인간을 신뢰한다는 처사가 참으로 신선하고 고마웠다. 비로소 인간으로 대접 받는 것 같고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기차는 무엇일까. 인간의 띠를 형성하는 아담으로부터 나까지 연결되는 무한한 인간의 사슬이 그것 아닐까. 나의 증조부에서 할아버지까지 연결되는 객차, 할아버지에서 아버지까지 연결된 객차, 아버지에서 나까지 연결된 객차, 나에서 아들까지 잇는 객차, 그리고 아들에서 손자까지 연결되는 객차, 손자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밑도 끝도 없이 하염없이 연결되고 이어질 셀 수도 볼 수도 없는 무한대의 기나긴 하나의 기차.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부여된 란 유전인자를 모시고 삼라만상을 관통하며 우주공간을 달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기차는 없다. 세상에 이 열차의 길이를 따를 철로마저 없다. 태초 인간이 생성된 이래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순간까지의 기나긴 여정의 띠- 이 기차를 감히 누가 따르랴.

비 오는 날 마당 끝에서 끝을 잇는 빨랫줄에 맺힌 빗방울 대롱대롱

빗방울을 관통하는 유전인자 조상님들로부터 각각 하나의 화물차가 된 인간의 띠라면 나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대대로 집적된 하나의 화물차로서의 인간. 오로지 변함없는 것이 있다면 로서의 아담.

이걸 내가 마지막 기차 칸에서 사라지는 철로의 소실점을 바라본 것처럼 하나님이 보신다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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