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아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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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아침 길
  • 김영택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11.2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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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칼럼위원)
김영택(칼럼위원)

| 중앙신문=김영택 | 겨울을 재촉하는 듯한 궂은 비가 밤새 요란스럽게 내리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쳤다.

비가 그치자 어제 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기온이 찬 공기로 변하여 얼굴이 시릴 정도로 쌀쌀해졌다 들려오는 일기예보는 대륙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의 영향으로 점차 추운 날씨로 변해 갈 것이라고 한다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되자 가을의 변화를 신기하게도 바람이 먼저 알려준다.

단풍처럼 한껏 무르익어가던 늦가을의 날씨가 갑자기 찾아온 추위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영하권으로 뚝 떨어졌다. 혼자 겨울을 만난 사람처럼 방한복 차림으로 길거리에 나서자 스치는 바람이 알싸하다.

골목길을 벗어나 큰 길 가에 도달하니 비바람에 어지럽혀져 산만해진 아침 풍경이 눈앞에 들어 온다 걸이대에 걸린 현수막들은 사납게 찢겨나갔고 일부 상가의 간판들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덜렁거리는 모습이 흉물스럽다.

새벽이 되면 도시의 아침은 활력에 넘쳐나 차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건만 간밤의 소란과 예상치 못한 추위에 쫓겨서인지 가벼운 조깅과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 오늘따라 보이지 않고 지나다니는 차량도 한산하기만 하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린 연무현상으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는 희미한 가로등들이 밤을 지새워선지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고 찬비를 맞으면서 바람에 낙엽을 떨구기를 주저하던 은행나무들의 헝클어진 자태가 애처로워 보인다.

도시의 미관과 녹색환경을 조성코자 가로수로 식재된 은행나무는 어젯밤에 내린 비를 맞고 우수수 낙엽을 떨꾼 초 체한 모습이었으나 은행잎이 널려진 길거리만은 황금색이 빛나는 낭만의 거리 골드 길이었다.

샛노란 은행잎이 길바닥을 장식한 골드 길은 영웅을 맞아드리는 개선문의 붉은 카펫보다도 더욱 빛나 보였고 감동적으로 보였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은행잎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니 지난시절 노란 은행잎을 책갈피 속에 간직하고 꿈과 희망을 노랗게 물들였던 학생 시절이 순간적으로 떠오른다.

누구나 오래된 기억은 세월 속에 잊히기 마련이고 되돌려지기 어렵지만 그래도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의 기쁨만은 목마른 갈증을 해소해주는 샘물 같고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다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수명이 무척 길다. 그에 따라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이 많고 전설과 같은 야화도 지역마다 산재되어있다. 천년의 용문산 은행나무는 마의태자의 한이 서렸고 신륵사의 은행나무는 국태민안을 바라던 무학의 꿈이 심겨있다.

노란 은행잎이 가져다준 낭만에 흠뻑 젖어 황홀경에 빠져있는 사이 어디선가 청소도구를 휴대한 미화원이 나타나더니 도로에 떨어진 은행잎을 부지런히 쓸기 시작했다. 환경개선의 길잡이로 이른 아침부터 시가지 청소에 나선 미화원은 길가에 흩어져있는 은행잎을 순식간에 쓸어 모아서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아 청소차가 싣고 갈 수 있도록 뒷정리까지 한 후 은행잎에 시선이 꽂혀 제갈길을 모르는 내가 마치 정신병자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눈길 한번 마주치지 않고 휑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낭만을 불러왔던 노란 은행잎이 깨끗이 치워지고 삭막한 분위기로 돌변하자 길거리 청소를 마치고 가버린 미화원의 행동이 아쉽기도 하고 미련이 남는다 또 쓰레기로 변해 치워 진 은행잎이 눈앞에 어른거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잎으로만 느껴져 발밑에 떨어진 은행잎 하나를 주워들었다. 주워든 은행잎에서는 은행나무 특유의 냄새가 났고 인근에서 낙엽을 태우는 것 같은 구수한 냄새가 솔솔 코를 자극한다. 노란 은행잎이 가져다준 낭만에 젖어 갈 길을 지체하자 바람은 괜스레 나무를 흔들고 낙엽을 굴리는 심술을 부리다가 그것도 부족한지 일진광풍을 내게 휘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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