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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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순간들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10.3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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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여자 중학생이 어린 초등학생을 귀여워하고 있다.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에 입을 맞추어 보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사차선 도로가 달리는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힙합인지, K팝인지, 아니면 탭댄스인지 혼자 지그재그 자지러질 듯 춤을 추는 것이다. 물론 초등학생 보라고 추는 춤이건만 초등학생은 관심조차 없다. 그래도 그녀는 돌아와 초등학생의 머리를 또 매만진다. 중학생은 초등학생만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실은 자기가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른다.

제주도 석양은 아름다웠다. 구름 한 점 없는 서쪽 하늘에 막 해가 떨어지고 있다. 해를 중심으로 붉게 물드는 넓고 넓은 하늘이 핏빛으로 물드는 순간이다. 해안가 끝 지점인 벤치에 앉아 있는 연인. 숨 막힐 듯한 절경에 몸 둘 바 몰랐던가. 자리 바꾸어 앉는다고 별 차이 없을 텐데 자리를 바꾸어 앉는다. 이 순간을 찾아 수많은 카메라맨들이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전국을 족히 누볐으리니.

고등학교 이학년 때였으니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그때 ‘KBS 라디오 게임’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박종세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고 각급 고등학생 대항 게임으로 꽤 인기가 높았다. 그 프로그램이 시골 우리 학교에 배정될 리 없어 학교 단독으로 게임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대 2학년. 학년 대표로 4명씩 나가 문제가 나오면 맞추는 시합으로 1:1이 아니라 4:4, 학생 8명 중 먼저 맞추는 학생의 팀이 득점하는 게임이다. 2학년인 나는 국어 선생님이 읽는 ‘전국 라디오 게임’을 전날 밤 몽땅 읽고 갔다. 문제는 대부분 거기서 나왔다. 밤새운 덕을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문학 문제 전반은 내 몫이었다.

그런데 음악이 문제였다. 원래 음치라서 음악은 초등학교 때부터 포기한 몸이다. 우리 팀에도 마땅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몽땅 3학년 몫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풀고 풀어서 마지막 동점이 되고 말았다. 연장전의 한 문제가 승패를 가른다. 아나운서의 문제 낭독이 문학 분야였다. 좋아, 이 문제는 내가 맞춘다. 아니나 다를까 아는 문제였다. 맞추고 승리했다. 와아, 대단한 함성이 들렸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시선이 나한테 꽂히는 것만 같았다. 일약 영웅이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게임장에서 나왔다. 그리고 걸었다. 교정 주위를 돌고 돌았다. 세상이, 세상이 왜 그리 밝던지.

머리 스타일이 참으로 엉뚱하다. 저거 여자 머리야? 남자 머리야? 쇼트커트 머리라면 더 과감히 쳤어야 한다. 그런데 이건 쇼트 같기고 하고 오래 돼 너무 자란 것도 아니고, 머리의 윗부분은 볼륨을 주어 여자 머리인지 남자 머리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여자들과 어울려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블라우스가 봉긋이 솟아올랐다. 여자다.

대학 강변가요제에서 유별난 창법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여자가 있었다. 경쾌하고 강한 소프라노의 여자다.

다이내믹한 창법이었다. 기어이 그녀가 대상을 받았다.

대상을 받고 난 자리, 난데없이 날아든 워커 한 짝이 그녀의 뺨을 정통으로 맞히는 것이다. 무지 아팠을 것이다. 아아, 그 순간 세상이 어찌 빛나던지. 혹 나만 그렇게 느꼈다면 나는 확실히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어느 쪽의 십부장이나 백부장쯤은 될 것이다. 하여튼 군화로 맞아 눈앞에 별들이 번쩍였던 것만큼 세상도 명멸하고 있었다.

주유소에 젊은 여자가 주유를 한다. 움직임이 활동적이다. 작업하는 팔 다리 몸통의 움직임 하나하나 생기 넘치게 작동 중이다. 어디 하나 여느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다. 아침 냇물에서 튀어 오르는 싱싱한 한 마리의 물고기. 어찌나 생동적으로 보이는지 내가 그녀를 보는 순간의 눈빛, 창문을 열고 팔 하나 창틀 위에 얹는 동작 하나만으로 그녀가 놀라 물러선다. 실은 내가 그녀의 싱싱한 몸동작에 놀란 반사작용인데. 그녀를 보려고 다시 찾았건만 그녀는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의 그녀를 잊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이다. 나왔어도 대중에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다. 하남 인터체인지 요금계산소에서 아산병원 가는 길을 물었다. 그 길이 어찌나 복잡한지 한두 번 다녔으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내 뒤로 수많은 차량이 들이닥치는데도 여자는 재빨리 설명을 하면서 메모지에 일일이 메모까지 해주었다.

“곧장 가시다가 상일 IC로 가지 마시고 좌측 외곽 순환도로를 타세요. 한참 달리다 서하남 IC로 나가면 올림픽대로가 나오고 그 길 쭉 따라가다 풍납 사거리가 나오면 대개 여기서 헤매는데 직진과 좌회전 사이 2차선 작은 도로가 보입니다. 그 길로 좌우 차량 조심하면서 들어가세요. 그리로 쭉 가면 아산병원입니다.”

그 복잡한 길을 싫은 내색 없이 적극적으로 쉽고 간편하게 설명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낭랑한 목소리. 그녀의 메모를 들고 길을 쉽게 찾았다. 그녀의 얼굴은 맑고 투명하며 아름다웠다.

엊그제 훈련 중인 여군 하사관이 TV에 방영되었다.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장면 몇 가지를 보았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건 그녀의 식욕. 큼직한 동물의 다리 부위를 힘차게 물어뜯고 삼키는 근육 하나하나의 동작들.

짧고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냉혹한 결단, 정확하게 안배된 힘의 균형, 집요한 동작의 연결, 그리고 물 흐르듯 흐르는 유연성….

힘차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찬란하고 풍요로운 순간들이 모여 비로소 생의 동력이 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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