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국화를 피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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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국화를 피어나게 한다
  • 중앙신문
  • 승인 2019.10.2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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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칼럼위원)

말복이 지나고 입추가 지나니까 가마솥처럼 뜨거웠던 더위가 제 스스로 물러나고 아침저녁 제법 스산한 날씨로 인해 몸이 움츠려진다 지칠 줄 모르고 맹위를 떨치던 더위가 물러가니까 더위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쩔쩔매었던 일상생활이 진정제를 맞은 것처럼 안정을 되찾았다.

계절이 달라지니까 하늘은 유리창처럼 시원하게 탁 트였고 산들도 여름 햇빛에 마냥 태운 녹색 피부를 드러내 놓고 자랑을 한다. 깊어가는 가을밤은 어느새 모여든 귀뚜라미들의 콘서트 장소가 되었고 밤새 소쩍새를 불러드린다.

여름 지난 가을은 국화를 아름답게 피어나게 한다. 별빛 흐르는 밤을 타고 새벽에 내린 이슬을 먹고 국화는 한껏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꽃송이를 피어 올린다. 제철을 맞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국화 전시장에 가보면 이름 모를 소국부터 시작해서 주먹같이 큰 대국의 모습을 보게 되어 꽃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에 젖어든다.

그윽한 향을 뿜는 국화의 매혹적이고 고운 모습에 이끌려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그 향에 도취되어 잠시 동안이지만 꽃이 되길 꿈꾼다 국화가 피어나는 가을이 되면 봄부터 심어져 가을까지 내려온 관상용 꽃들이 국화의 그늘에 가려져 향기를 잃고 시들해져서 눈앞에서 사라져 간다.

우편물 관계로 인해 잠시 우체국에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사무실 주변 한편에 잘 가꿔진 여러분의 국화 화분들이 가즈런히 진열되어 시종 눈길을 끌었다. 봄에 삽목해 심긴 것으로 보이는 국화들은 노란색 흰색 주황색 등으로 색색을 이루며 건물 내부의 미관을 돋보이게 했고 은은한 향을 내뿜었다. 국화를 바라다보니 서정주 시인의 국화꽃 옆에서의 시가 언뜻 머릿속에 떠올랐다. 퍼줄 맞추듯이 생각나는 대로 시를 암송해 내려갔다. 하지만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라는 대목에서 나는 더 이상 국화꽃 앞에서의 시구를 흥분과 감격에 겨워 암송해 내려가 질 못했다. 시를 읽어내려 감에 따라 마음은 감상적에서 점점 감동적으로 빠져들었다. 국화꽃 옆에서의 문장은 긴 세월의 적적한 기다림을 이겨내고 꽃길을 사뿐히 걸어오는 듯한 여인의 환상으로 이어져 가슴을 쓸어내리고 쿵쾅거리게 했다.

누군가가 시는 세상을 창조하고 소설은 역사를 만든다더니 시인의 글하나 가 인간사회를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함을 거듭 깨닫게 해 준 것이었다.

이 땅에 핀 꽃들이 모두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제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꽃들만의 특징이다. 여름을 이겨내고 인내하여 꽃을 피우는 국화는 그런 면에서 사람들과 더 가깝고 포근한 사랑을 받는가 보다. 그윽한 국화향을 맡게 되면 장미처럼 향긋한 냄새와 라일락 향기처럼 달콤한 향기의 유혹보다도 짙게 느껴져 국화향이 풍겨 오는 곳으로 나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진다.

만약에 사람이 아니고 나비와 벌 같은 곤충의 몸이었다면 국화꽃 속으로 기어들어가 황홀경에 빠져 들었을 것만 같은 부질없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지배한다. 국화꽃이 피면 만추의 가을이 농익어간다 황금들녘은 수확의 기쁨으로 바빠지고 산하는 침묵의 겨울로 가는 준비에 소리 없이 빠져든다. 집 주변과 온실에서 사람의 손길에 의해 잘 가꿔져 소담스럽게 꽃을 핀 대국과 들녘 따라 애잔하게 꽃을 핀 작은 들국화의 모습이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이채롭기 짝이 없다.

낮과 밤의 급격한 기온 차이와 세월의 풍상을 꿋꿋이 이겨내고 꽃을 피어 올린 국화의 단아하고 청초한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속을 또 다른 서정의 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국화꽃을 바라다보면 시인과 화가가 아니더라도 뭉클 솟구치는 그리움을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전해보고 싶고 노란 국화꽃 화분 하나를 달빛 비치는 창가에 놓아두고 밤새 즐기고 싶은 마음에 문득문득 빠져든다. 우체국에서 국화를 바라보고 있다가 시간에 쫓겨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쉬움이 작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집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허전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국화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거실을 배회 도중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지난가을에 아내가 국화차를 만들려고 햇빛에 잘 말려 보관 중인 국화잎이 생각났다 생각 난 김에 확인을 해둘 필요가 있어서 식기와 음식물로 둘러싸여 찾기가 엄두가 안나는 주방을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말린 국화잎을 찾아냈다. 용케 찾았다는 기쁨과 국화차를 꼭 마셔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물을 끓였다. 그리고 용기에 끓여진 찻잔의 물속에 한약재처럼 보이는 국화잎 몇 잎을 띄웠다. 이내 찻잔 속에서는 모락모락 국화향이 피어오르고 거실은 상큼한 국화향으로 가득 찼다.

고맙게도 전시장과 들녘에서 보아왔던 색색의 국화들이 한 잔의 찻잔 속에서 향기를 뿜으며 되살아난 것이었다. 기쁜 마음을 추스르며 급히 차를 마시기보다는 시간의 여유를 갖고 오랫동안 국화향을 즐기고자 찻잔을 들기를 망설이다 보니 어느새 찻잔의 온기는 겨울을 만난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만 간다 일순간 후회가 되어 식은 찻잔을 들고 온수에 우려낸 국화차를 비우려 했으나 거실에 배어든 국화향을 거둬내는 멋없는 행동을 취하기에는 내심 탐탁치가 않았다. 더구나 국화꽃이 절정으로 피어난 이 낭만의 가을에 자연을 훼손하고 국화향을 소멸시키는 놀부 같은 악역을 떠맡기는 정말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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