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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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 거야
  • 송년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09.1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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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송년섭 | 기상청 기록에 남을 질기고 세찬 장맛비로 개울이 막히고 논둑이 무너져 농토가 망가지고 난리가 났다. 시꺼멓게 찌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가 그치기를 바라지만 심술이 난 하늘은 계속 비를 뿌려 댄다. 걱정스런 얼굴로 아내는 하늘을 원망한다.

“괜찮을 거야. 하루 이틀 지나면 장마도 끝나겠지 뭐”

할퀴고 깨뜨리고 장마가 끝난 뒤 텃밭을 둘러보니 심은 지 며칠 된 들깨는 누렇게 맥을 놓았고 옆 밭 참깨는 쓰러져 썩어갈 판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깨 농사가 통째로 망가질 것 같다.

“들깨 비료 좀 줘야겠네. 진즉에 참깨 줄 좀 매자니까 민적거리다가 농사 망치겠네. 지금이라도 줄을 맵시다.”

“괜찮을 거야. 기다려 보자구. 장마가 한 달 이상 간 적은 없으니까”

아내가 들깨 밭에 질소 비료를 뿌리는 옆에서 참깨 줄 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 한 마디 거들다가 핀잔만 들었다. 올 장마는 달포 이상을 끌다가 농민들 가슴에 물바다를 만들어 놓고 뒤늦게 물러섰다. 동네 노인들은 평생 이렇게 긴 장마와 폭우를 본적이 없다고 혀를 내 두른다.

열댓 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고추 100여포기, 토마토 댓 주, 쪽파, 당파, 오이 몇 포기를 심었다. 관수(물주기)를 제때 못하니 작물들 생장이 들쭉날쭉하다.

지나다니는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지도를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내는 그 잘난 농사를 망칠 가 봐 걱정이다. 고추 모가 덜 자랐는지, 병인지 비실비실하는 걸 심었다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고추모를 다시 심으라고 한지 며칠... “지금도 늦지 않다니 고추모를 새로 심고 딴 것들은 밖에다 옮겨 심읍시다.”

“괜찮을 거야. 물주는 것, 비료 주는 것을 조금 조심하자구”

다행하게도 그 후에 고추는 잘 자라 다른 집에 손색없이 잘 되었다. 고추 옆에 심은 토마토는 거름을 너무했는지 굵게 잘 자란다. 옆 가지 싹을 잘라주어야 하는데 어느 틈에 무성하게 자라 열매는 보이지도 않고 잎만 무성하다.

“괜찮을 거야. 그래도 싹이 좋아야 열매도 튼실하지.” 결국 옆 가지 때문에 토마토는 몇 개 못 먹었다.

나는 게으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교훈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랐어도 모든 일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게으름을 부렸다.

내 아내는 바지런하며 성실하다. 서울에서 살 때는 잘 나타나지 않던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차이가 시골에 내려와 농사일을 하면서 확연히 드러난다. 가끔 아내에게 핀잔을 들을 때가 있어 어느 때는 투정을 부리고, 다툼이 벌어진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 보면 상상도 못하던 어려움에 막히고 늘 배워도 모자라기 때문에 농촌 일에 익숙하지 못한 나에게는 늘 버겁지만 초보농부인 아내는 남에게 뒤 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 한다.

큰 농토는 동생이 맡아 짓고 우리내외는 집 앞의 몇 뙈기 멍석만 한 밭에 여러 가지 작물을 심는다. 농사라야 주로 부식거리이고 면적도 좁아 농사라고 이름을 붙이기 부끄럽지만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심지어 겨울에도 할 일이 있으니 게으름을 부릴 겨를이 없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일은 시기를 놓치면 낭패이니 밭 갈기부터 품목, 종자 선택, 비료 농약까지 한 가지도 만만한 게 없는데 남 하는 대로 따라하니 아내의 힘이 배로 든다.

참깨, 녹두를 털고 그 자리에 김장용으로 배추 100포기. 무, 달랑 무, 돌산 갓 등을 심는데 밭갈이는 동생 트랙터가 수고를 하고 나는 비닐 씌우는 일로 김장 준비 완료, 끝이다.

장마 끝나고 며칠 가물더니 배추가 십 여 포기나 타 죽었다. 무씨를 묵은걸 샀는지 싹이 안 터 다시 씨를 넣었다. 아내가 밭에 물 좀 주라는 걸 귓등으로 흘리고

“괜찮을 거야. 모종에 물이 묻어서 버틸 거야. 물을 주면 오히려 뿌리가 녹을 거 같은데!?” 게으름을 부린 내 잘못이 크다.

요즘 농가에서는 대부분 고추건조기를 사 놓고 기계로 고추를 말린다. 곯아서 버리는 일도 없고 빠르고 일정하게 잘 마르니 바쁜 일손에 이만한 덕도 없다.

우리는 동생이 고추를 말릴 때 꼽사리를 끼는 형편이니 고추 따는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 농익어 곯을 때도 있다. 아내는 동생네 고추 말리는 시간을 알아보고 우리 시간에 맞추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이다.

“괜찮을 거야. 덜 먹으면 되지. 바쁜 애 보채지 말자구.”

나 하는 일은 항상 “괜찮을 거야” 이다. 사람 구실하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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