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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08.1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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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글 한번 쓰자면 꽤 신경이 쓰인다. 이 볼펜으로 쓰자니 너무 오래돼 잉크가 안 나올 것 같고, 저걸 쓰자니 심이 너무 가늘 것 같고, 요걸로 하자니 너무 작아 씀씀이가 불편할 것 같다. 요즘 볼펜으로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다. 너무 많아 고르는 것도 힘들거니와 안방, 건넛방, 뒷방, 거실 연필꽂이마다 볼펜으로 꽉 차 더 들어갈 여유조차 없다.

“이걸 모두 가지고 나가 화르르 불살라 버려?”

“문필가라는 녀석이 지필묵의 필과 묵의 영역을 담당해온 볼펜을 하루아침에 화장해 버린다는 게 할 짓이냐.”

문득 20여 년 전에도 볼펜을 버리려는 나를 아내가 극구 말렸던 기억이 났다.

“말라붙어서 쓰지도 못하는 것들이야.”

내 뜻대로 버리려 하니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가져오는데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끽소리 못하고 그냥 썼다.

볼펜이란 게 그렇다. 욕심이 나서 훔쳐오는 것이 아니라 빌려 쓰다가 무심결에 주머니에 넣고 오는 게 다반사다. 어떤 때는 내 비싼 볼펜도 엉뚱한 녀석에게 빌려 주었다가 되돌려 받지 못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볼펜은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흘러 다니는 물에 뜬 부유물과 같다. 또 수집을 할 양이면 밑도 끝도 없는 것이라 집에 이렇게 많이 쌓여 있건만 미국 여행을 하면서 투숙하는 호텔마다 그 호텔 고유의 볼펜 한 개씩은 꼭 가져온 일도 있다. 그것도 아무짝에 못 쓰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깝고, 기어이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공항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어린이들이 많았다. 그 애들이 어찌나 볼펜수집에 열렬한지, 볼펜을 안 주면 울어 버리는 통에 안줄 수도 없었다. 이놈의 볼펜들 우즈베키스탄으로 공수해 그 애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법은 없을까.

볼펜이 처음 나왔을 때, 볼펜을 거꾸로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잉크가 새는 바람에 와이셔츠 주머니 밑부분이 퍼렇게 물드는 일도 있었다. 그걸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 또는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고 그렇게 보이려고 은근히 과시를 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누구나 모나미 볼펜을 썼다. 모나미 볼펜만 쓰면서 자랐고 모나미 볼펜만 보며 컸다. 모나미 볼펜이 이 나라 근대화의 밑거름이 된 것은 인정해 주어야 마땅하다. 모나미가 프랑스어로 ‘나의 친구’라는 것 은 한참 뒤에 알았다. ‘모나미’. 어감이 좋았고 뜻도 좋았다. 153은 15원짜리 모나미 3번째 제품. 참 재미있는 볼펜이다.

몇 년 전 때늦게 못다한 철학 공부를 하는데, 이 볼펜을 써보라고 사무국장이 권했다. 모나미가 아니었다. 까만색 몸체에 흰 악센트를 준 유선형의 볼펜이었다. 시험이 주관식이라 일단 많이 써 보고 외워야 했다. 사무국장이 권하는 볼펜으로 쓰니 글씨가 굵고 거치는 것 없이 물 흐르듯 잘 써졌다. ‘어, 이거 뭐야.’ 조목조목 따져보니 이름은 제트 스트림, 볼펜심은 1㎜, 순 일제다.

어느 틈에 싸구려 문구류에 일제가 끼어들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모나미에서 느껴보지 못한 질감과 편안함, 현대 감각에 맞는 디자인.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시험 내내, 공부가 끝날 때까지 제트 스트림을썼다.

국산 애용의 시대도 끝났다. 그만큼 보호받았으면 이제 자력으로 국제 무대에서 이겨야 한다. 신토불이도 고집을 부릴 만큼 부렸다. 이젠 시골 밥상도 토종이 아니다. 중국 채소, 러시아 임연수어, 노르웨이 명태, 호주산 쇠고기, 다채로운 국제화 밥상이다. 40년 전인가 유럽에서 그들의 국제화 식단에 참으로 어이없는 나라라고 했는데 이젠 우리나라가 그렇다. 그걸 보고 한국의 젊은이들이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로 진출해 차기산업을 개발해 돈 벌자고 뛰어든다. 이미 한국에서 거친 과정이니 눈에 보이니까. 우리나라 현상만이 아니다.

일본이 그렇고 중국이 그렇고 타이완이 그렇다. 발 빠른자가 이긴다. 작은 볼펜 하나에도 인간 심리가 왕복 운동을 해 국산품에 목을 매지 않는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다. 소설가도 수필가도 연필이나 볼펜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컴퓨터로 두드린다.

그래서 연필이나 볼펜의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었다. 길을 가다가 글을 쓸 일이 있어도 스마트폰 메모장에 엄지손가락 두 개로 두드리며 글을 쓴다. 앞으로 연필이나 볼펜은 선물용이나 이벤트성 행사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구세대 문구용으로 퇴보할 것이다. 시대의 화석. 잠시 붐을 이루었다 사라진 카폰이나 삐삐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석의 반열에 오르리라. 그러나 저러나 이 넘쳐나는 볼펜은 어떻게 처리한다? 내다 팔 수도 없고, 폐품으로 버리자니 아내가 가로막을 것이며, 우즈베키스탄에 공수할 수도 없고, 박물관에 보내기는 너무 이르며, 폐비닐, 폐플라스틱처럼 폐볼펜 처리하는 방법은….

그런데 먼저 버려야 할 게 보인다. 평생 동안 읽고 또 읽어 축적된 무형의 재산이라 자랑하던 소설들, 문법들, 언어, 법칙, 사유, 지식, 어느 것 하나 가난한 빵 한 조각 구하지도 못할, 내가 죽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한 개 USB의 용량도 못 채울 내 머릿속의 잡동사니들, 그리고 내가 볼펜으로 기록했던 모든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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