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선물 나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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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선물 나쁜 선물
  • 송년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08.0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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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송년섭 | 유난히 무덥고 질질 끌던 장마가 그치면 어느 새 추석이 닥친다. 명절 준비와 함께 선물을 챙겨야 할 때가 되는 것이다. 

꼭 보낼 데와 작년에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께 답례할 선물을 고른다. 올해도 몇 년째 보냈던 갈색설탕으로 결정해 버렸다. 추석을 며칠 앞 둔 날 오후 동네친구 안종화가 찾아왔다. 양 손에 선물이 분명해 보이는 물건을 들었다. 얼마 전에 안종화부인이-그 녀는 나와 동본 동 항렬(行列)이고 나이가 적어 하루아침에 나의 동생이 돼버린 여인이다- ‘고구마 줄거리김치’얘기를 해서 내 아내가 담그는 요령이며 맛을 물어 본 적이 있는데, 한 탕기 담아 온 것이다.

“몇 년 전에 강원도에 놀러 갔다가 다래 싹을 몇 뿌리 가져다 심었는데 죽고 살기를 거듭하더니 겨우 한 뿌리가 살아남아서 작년부터 열었어. 작년엔 몇 개 달렸더니 올해는 꽤 열었네. 한번 맛봐. 달콤하니 맛있어.” 다래를 조그마한 스치로폼 그릇에 담았는데 랩을 벗겨내고 검푸른 놈 하나를 입에 넣으니 스르르 녹는 맛이 일품이다. 잘 익은 다래는 향기도 있고 맛이 입 안 가득 오래 남았다. 머루와 함께 전국각지 산속에 자생한다고 돼 있는데 우리 시골에서는 보지 못했다.

나에게는 고모님이 한 분 계셨다. 아버지가 3대 독자이시고 대고모, 왕대고모도 안 계셨으니 우리 집안에 육 십 년 만에 태어난 귀한 따님이었다. 나이 스무 살에 강원도 횡성으로 시집을 가셨다. 내가 고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시집갈 때 집 앞 도랑을 건너다 말고 내 손을 잡으며 엉엉 우신 것으로 시작한다. 

그 몇 년 후 친정집엘 오셨는데 꽃술을 단 버선을 만들어 동생 붕섭이와 내게 주셨다. 발 크기를 재고 만든 것 같이 잘 맞았고 예뻐서 닳아 없어질 때 까지 신었다. 고모님은 자주 오시지 못했는데 요즘 같이 교통편이 좋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농토도 많고 시어른을 모시자니 별일이 아니면 친정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6.25 김일성 침략전쟁이후 오셨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고모부께서 징집 대상이 되었는데 독자라서 병역이 면제되는 줄 알았다가 영장이 나오니 시어른께서 돈을 들여 손을 쓰신 모양이다. 화병(火病)이 나신 시어른은 급기야 아편에 손을 대었고 집안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고모님은 두어 번 더 오셨는데 돈 문제 아니었나 싶다. 시골 부자가 망해가는 코스를 고모님도 따라갔던 것이다. 어느 해 고모님은 익지 않은 머루와 다래를 몇 됫박 가져오셨다. 친정에는 가는데 마땅히 가져갈 선물이 없으니 뒷산에서 따 오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쌀독에 넣어 익히고 그것을 아주 조금씩 꺼내 주셨다. 지금 그때의 다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모님의 한 맺힌 눈물을 먹었던 것 아닐까.

내가 기억하기에 가장 오래되고 정겨운 선물, 꽃술버선과 머루 다래. 가끔 고모님과 함께 떠오르는 이 선물은 고향과 친정을 못 잊는 어느 촌부의 눈물이요 정이었다. 고모님은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붙잡고 버티며 살림을 혼자 꾸려 나가야 했다.

삽자루 한번 안 잡았던 시골부자 외아들은 무일푼 빈손으로 가족을 이끌고 원주시내로 나오신 후 난생 처음 막노동을 하시며 먹고 살아 갈 방도를 찾아 손이 거칠어 졌고, 고모님은 평생 남의 일이었을 보따리 장사를 하며 자식을 키웠다. 

얼핏 수심과 고뇌에 찬 고모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조용하고 순한 산속 오솔길 같아야 할 여인의 인생길이 깔딱 고개의 연속이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와중에도 사촌들은 올곧게 잘 자라 교육자로 사회지도층으로 활약하니 후손에게 남긴 또 하나의 선물일까. 고모님은 그렇게 고생하시다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나이에 상관없이 선물을 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생일이나 가정행사, 축하받을 일이 있을 때, 자식들이 건네는 작은 돈 봉투는 그들의 형편을 잘 알기에 마음이 짠하다. 우리네 서민들이야 뇌물성 값 비싼 선물은 꿈속의 일이요, 정을 나누는 마음의 표시라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데, 가끔 뜻밖의 선물을 받을 때는 가슴이 철렁한다. 

국회의원들이 주는 선물이다. 월급은 제일 많이 받으면서 하는 일은 없이 나라의 발목이나 잡고, 법을 만들면 지키는 게 아니라 반드시 어긴다. 제 잘못을 남에게 돌리고 남 탓만 한다. 

감사를 받고 정신을 차려야 할 집단이 국회인데 저희들이 남을 감사한다니 우습다고 비아냥거리는 만화를 보고 통쾌하다. 올 해도 국회의원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아주 나쁜 선물을 가득 안겨주고 있다.

안종화가 가져온 달콤한 다래가 고모님이 가져오신 설익은 다래에 오버랩 되며 내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몇 해 전 돌아가신 불쌍한 내 고모님을 일깨워 준다. 같은 다래선물이 왜 이렇게 기쁜 선물도 되고 눈물 나는 선물이 되는가.

이번 추석에는 자식들에게 선물의 의미를 모르던 어린 시절의 아주 슬픈 선물들과 대고모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족의 소중함과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이야기 해주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에게 안겨주는 나쁜 선물이야기는 나 혼자만 안고가야 할 것 같다. 그들 때문에 좋은 선물의 뜻이 묻히는 게 아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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