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순 칼럼]잔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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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잔디에게
  • 중앙신문
  • 승인 2017.06.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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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수필가, 칼럼위원)

오늘도 나는 풀에게 지고 말았다. 잔디의 가슴에는 무슨 풀씨가 그리도 많이 숨어 있는 것일까?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풀은 어둠에 잠기며 내 등 뒤에서 손을 흔든다. 이겼노라고.

처음 양평으로 이사 왔을 때는 아직 잔디가 푸르러지기 전인 사월이었다. 마른풀 빛을 벗지 못한 잔디밭 여기저기에는 가느다란 파란빛으로 고개를 드는 이름 모를 풀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엔 여린 싹들이 무슨 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잎이 나고 키가 커지면서 어느 것은 제비꽃도 되고 꽃다지도 되고 민들레가 되어 숨어서 꽃이 피어 버렸다. 첫해엔 잔디밭에 수줍게 핀 제비꽃에 마음을 빼앗겨서 잔디밭 가 한 곳으로 모아 심어 주었다.

그렇게 민들레는 이 쪽, 씀바귀는 저 쪽 귀퉁이에 두고 노랗게 하얗게 풀꽃이 피는 것을 반가워했다. 그런데 꽃이 지고 그 씨가 퍼지더니 잔디밭은 순식간에 풀꽃 밭이 되었다. 그리곤 잔디는 그 터전을 잃고 삭아서 없어져 버렸다. 자연 속에 공존은 어려운 것이었을까? 각기 제 자리를 지키며 어울려 살아가길 바랐건만 잔디와 풀들은 서로 밀고 밀리며 생존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잔디밭의 주인이 될 것인지 풀꽃들의 주인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제비꽃을 뽑고 민들레를 캐내며 잔디를 달래기 시작했다. 내가 잔디밭에 돋아나는 다른 풀들을 허용하질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나와 풀들의 그 소리 없는 끈질긴 실랑이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풀을 뽑다 보면 풀씨만큼이나 많은 질문이 생겨난다. 어제는 제비꽃으로, 망초로, 질경이로, 오늘은 민들레로, 씀바귀로, 바랭이로 그렇게 끝없이 솟아나는 것들은 다 무엇일까? 잔디 속에 키를 키우며 돋아나는 풀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원래 잔디 속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바람에 실려 날아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잔디도 나처럼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눌러도, 눌러도 올라오는 걱정이나 서운함, 그리고 욕심이나 두려움 같은 그런  마음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 하루는 막연한 걱정이 질경이로 나오고, 어느 날은 민들레가 두려움으로 꽃피고 망초 같은 욕심이 키를 키워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씀바귀로 서운해하고 애기똥풀로 화를 내고 그렇게 잔디가 말을 하는 것일까?

그 생각이 들자 이제는 장정이 된 아들의 어린 얼굴이 잔디에 겹쳐왔다. 그리고 그 투정을 받아주듯 풀을 뽑아내는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 잔디야, 네 마음속에 품고 있는 풀씨를 어디 다 뱉어 내 보아라, 내가 여기 지키고 서서 하나씩 뽑아주마. 너는 그저 너답게 잔디로 무성해라. 그 풀 향기로 평화로우면 그것으로 네 몫을 사는 게 아니겠니?
사실 잔디야 화려한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열매를 맺지도 못하는 그저 녹색의 풀일 뿐인데 잔디가 가지런히 자라는 정원이 주는 아름다움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렇다 할 꽃도 열매도 없이 푸른빛 하나로 기꺼이 주변의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잔디의 삶이 무엇이라도 이루어 보려고 분주한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런 잔디밭에 풀이 나는 것을 보며 잔디가 아닌 모든 풀들을 하나하나 뽑아내는 일이 내 마음을 정리하듯 후련한 느낌을 준다. 잔디를 잔디이게 하는 것은 다른 풀들이 하나도 자라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쩌면 가슴속에 가득한 풀씨가 여기저기 아우성치듯 풀꽃으로 피는 것을 하나씩 뽑아내며 제 모습을 찾아 가꾸어 가는 것은 아닐까?

내일은 다시 잔디밭에 나아가서 밤새 풀꽃으로 고개를 드는 잔디의 투정을 어루만져 주리라. 두려움도 서운함도 속상함도 솎아 내고 푸른 잔디로 무성하도록 다독여 주리라.
이제는 어두워져서 잔디도 풀도 구별할 수조차 없는데 물끄러미 창밖을 보며 나는 잔디에게 말을 건넨다. 짙어지는 어둠을 닮은 질문 속에 잔디와 함께 잠기면서. ‘잔디야, 너는 네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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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창 2017-06-15 16:29:38
오늘은 풀에 지고 말았다............... 표현이 몹시도 아름다운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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