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늘보의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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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늘보의 궤변
  • 중앙신문
  • 승인 2019.05.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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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늘보는 행동이 느리거나 게으른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비가와도 느릿느릿 걷거나 급한 일이 생겨도 느긋하게 꾸물대는 사람을 볼 때 속이 뒤집힌다는 표현은 오히려 점잖은 편이다. 타고 난 성정이 느린 걸 탓해 봤자 탓하는 사람의 속만 더 뒤집어진다. 행동이 느리다는 것은 말 그대로이고, 게으르다는 것은 순발력이나 정신적으로 남을 따라가지 못하며 할 일을 제 때 하지 않고 뒤처지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겠다. 그러니 늘보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 이웃, 소속된 조직에 폐를 끼치게 되고 발전에 저해요인이 될게 뻔하다. 옛날 군 복무 때, 우리 소대에 늘보가 있었다. 모든 집합에 늘보가 와야 집합이 완료되고, 식사시간에는 늘보가 숟가락을 놓아야 끝난다. 훈련을 할 때 늘보 때문에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미안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늘보 때문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병장도 못 달고 상병으로 제대하며 소대장님 무운장구 하시라고 인사를 받고 이 착하고 여린 청년이 세상 살아 갈 일이 걱정 되었었다.

그런데 별명이 아니고 실제로 늘보라는 동물이 있다. TV에서 늘보의 이야기를 보고 옛날 그 이상병과 내 자신이 늘보에 겹쳐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 또한 늘보이기 때문이다.

늘보는 남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지역에 살고 있다는데, 원숭이와 비슷하게 생겼고 몸길이는 약 70㎝가량이라고 한다. 하루에 15시간을 자는 잠보이고 하루에 고무나무 잎 한 장 밖에 먹지 않는다고 한다. 엄청난 소식가이기 망정이지 그 꼴에 식사량이나 많으면 손가락질을 엄청나게 받을 게 틀림없다. 땅 위에서는 걸을 수가 없어서 수영하듯이 기어서 이동하는데, 하루 최대 이동거리가 900m도 안 되어 시속 37m정도이니 알만 하다.

봄이 완연하다.

앞마당 뜰 돌 밑에 벌써 민들레와 질경이 싹이 엄지 손 가락만 하게 돋아났다. 개울가 버드나무는 봄맞이가 끝나 푸른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3월 들어서도 맹위를 떨치던 혹독한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우뚝 일어서는 초목의 강인함이며, 에너지가 부럽다. 생명력이 경이로울 뿐이다.

나는 게으른 편이다. 한두 번 경험한 일은 덜 하지만 처음 만나는 일은 겁부터 난다. 그리고 의타심이 강하다. 번연히 내가 해야 할 일도 남이 해 주겠지, 아내가 해 주겠지, 내일 해도 되겠지, 미루기가 빈번하다. 담장 밑, 바람에 날려 와 쌓인 낙엽과 쓰레기를 모아 태우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인데 두고두고 보다가 불태우는 식이다. 양지쪽 논둑에 제법 자란 나생이(냉이를 우리 고장에서는 이렇게 부른다)며 봄나물을 보고 지나친다. 다음에 보면 남들이 캐갔다. 아내가 끓여주는 냉이 된장국은 맛있게 먹으면서도...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사랑채는 내 조부께서 100여 년 전에 지으신 하나 남은 조부의 유물이다. 오래 전 서울에 살 때 다니러 와서 보니 지붕이 새고 벽이 허물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 망가진 구들을 새로 놓고 그 위에 기름보일러를 깔아 이중 난방을 했는데 가끔 불을 땠더니 방안 장판이 온통 그을렸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온갖 살림도구와 음식료들로 가득 차 창고가 되어 버렸다. 방바닥 열효율도 맘에 들지 않아 최근에 전기 패널을 깔기로 하고 공사를 하려는데 사랑방에 가득한 잡동사니를 치우는 일이 가슴을 누른다. 어영부영 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 크게 마음을 다잡고 처남을 불러 함께 짐을 나르고, 공사를 끝낸 후 다시 짐을 정리하고 내게 소용되지 않는 짐을 퇴출시키니 방이 따뜻하고 훤해졌다. 처남은 잽싼 몸놀림으로 일을 하는데 나는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나는 뻔뻔스럽게도 내가 다 한양 내게도 이런 결단력이 있구나. 나는 늘보가 아니다. 늘보탈출에 성공했구나. 자만도 한다.

아버지는 내게 맡은 일에 충실하고 근(勤)하면 밥은 굶지 않는다. 부지런 하라고 늘 말씀 하셨다. 이 나이까지 부끄럽게 세상 살아온 것이 얼굴 뜨겁다.

봄이 되어 이곳저곳 일손들이 벌써 바쁜데, 마늘밭 비닐 걷고 제초제며 살충제를 뿌려야 하고 복합비료도 주어야 하는데... 남들은 벌써 끝낸 일을 이제 시작한다.

서울 대공원에 나무늘보가 있다는데 한 번 찾아가 만나야겠다. 한 시간에 40m도 못가는 그 녀석에게 위로도 해주고 빨리 달릴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싶다. 자동차를 타면 한 시간에 100km도 갈 수 있으니 자동차 운전을 배워 빨리 달려 보라고, 하루에 15시간이나 잠을 자면 사회생활에서 도태되니 잠은 6시간만 자라고, 늘보나라에서 대통령이라도 하려면 지식도 있어야 하니 한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오라고...

벌써 아내는 이번 봄 텃밭에 심을 작물의 이름을 들추며 봄 준비에 나섰다. 핀잔 듣지 않으려면 뒤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퍼뜩 정신 차려야 한다. 늘보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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