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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오동나무
  • 중앙신문
  • 승인 2019.05.1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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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 (수필가, 칼럼위원)

평생 살면서 이렇게 한 종류의 나무가 좋아지기는 처음이다.

5월 중순, 수십 년 나이를 먹은 오동나무가 예쁜 보라색 꽃을 다닥다닥 달고, 진초록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산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이상한 신비감을 내뿜고 있다.

우리 집 뒷산에 오동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다. 오동나무가 주변의 다른 키 큰 나무들과 빽빽이 들어 참 대나무를 거느리고 의연히 서 있었지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작년에 문우들이 집에 다녀가면서 내년 5월 오동나무 꽃이 필 때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오동나무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이 먼 곳까지 오동나무 꽃을 보러 오겠다는 마음이 고마움으로 승화되어 마음속에 꼭 박혀 있었나 보다. 관심이 없었을 때 오동나무가 두 그루인 줄 알았는데 문우들 얘기를 듣고 오동나무를 올려다보니 나무 사이에서 한 그루 한 그루 눈에 띈 것이 모두 다섯 그루나 되었다.

수십 년 씩 자란 커다란 나무들이 왜 이제야 눈에 들어 왔는지 모르겠다. 이 산속에 언제 누가 심었는지 모르지만 키 큰 나무들 속에 숨어 있어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잘 자라 주어서 고맙기까지 하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알게 모르게 스쳐지나 가는지 오동나무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느덧 5월이 다가오고 매일 오동나무를 올려다본다. 다른 나무들은 다 잎이 나오고 꽃을 만발하게 피워 산에 수놓고 있는데 오동나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서 있다. 매일 바라보아도 살아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동나무에 관심이 없을 때는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죽은 줄 알았다. 죽은 듯 서 있던 나무가 어느 날 잎은 나오지 않았는데 아래의 가지에서부터 몇 개씩 연한 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게 피었을 때 딱 맞추어 꽃구경을 오라고 하기 위해 하루 종일 오동나무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고개가 빠지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른 나무들은 꽃이 지고 잎이 넓어지면서 초록빛이 짙어가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그 때서야 침묵을 지키던 오동나무가 꽃을 내민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나뭇결이 고와서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나무로, 나무 중에 비단이라고 한다. 오동나무에 대한 추억은 친정어머니의 이층장에 가득 배어 있다. 어머니가 시집살이 하다가 세간날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유명한 장인에게 맞추어 주신 것이라고 하여 늘 손때를 묻히며 아끼던 장이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오동나무 꽃은 바로 가까이에서 보면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나무들 사이에서 보이는 보랏빛이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햇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이 가지각색이다. 우리네 삶이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듯 오동나무 꽃 색깔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넓적한 잎을 가진 산 속에 있는 오동나무가 산 속보다 집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은 그늘을 드리울지 아쉬운 생각까지 든다. 4월말부터 몇 개씩 피던 오동나무 꽃이 5월초로 접어들면서 만개를 하며 자태를 뽐내더니 5월 중순까지 많은 꽃을 달고 서 있다.

5월말이 되니 커다란 잎이 그늘을 드리우면서 꽃이 몇 개 남지 않았다. 바람에 떨어지는 보라색 꽃이 아까워 하루에도 몇 번씩 주워서 감상을 한다. 오동나무도 나처럼 꽃을 감상해 줄 사람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오동나무를 사랑하는 그분들이 다녀간 후 내년 꽃 피울 때까지 자랑스러움이 배어 온갖 풍상우로(風霜雨露)를 견디며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오동나무로 인해 삶의 여유를 찾고 인생을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멋진 수확이다. 찾아오는 분들이 몰고 오는 신선한 바람은 조용한 시골생활에서 잠자고 있던 감성을 일깨워 주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좋은 사람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오동나무 꽃을 감상하고 담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일은 산 속의 일상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활력소다.

이제 오동나무는 내 마음속에 소중하게 자리 잡은 나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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