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순 칼럼]잊혀진 기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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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잊혀진 기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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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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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수필가, 칼럼위원)

기억이란 향수처럼 한 순간에 밀려와서 진하게 나를 감싼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서서히 그 향이 줄어들어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다신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생생한 기억들이 뒤돌아보면 아물 아물 희미하게 사라져 어디론가 자꾸 흘러가는 듯하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말을 해 주어도 그때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지워져 버린 기억이 너무나 많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시간보다 잊혀진 일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지나간 날들의 기억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흘러가는 시간 또한 그러하다. ‘지금’은 분명 새로운 시간을 끊임없이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새 시간을 맞이하는 바로 그 순간,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이 된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같이 가 버리는 나의 기억은 멀어져 가는 물소리처럼 먼 침묵 속으로 묻혀버린다.

집 앞 개울물은 겨울비 내리더니 얼음을 녹이며 소리 내 흐른다. 떨어진 빗방울은 어느새 물살에 휩싸여 사라지고 없다. 그저 빗줄기였던 기억에 아직 취한 채 이젠 개울물이 되어 흘러갈 뿐이다. 산골짜기를 지나온 물줄기가 희미해지는 산자락의 기억을 잡고 소리치고 있다. ‘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왜 흘러가는 거지?’ 답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물살이 되어 흘러갈 뿐이다.
멀어지는 산 그림자를 마음에 새기며 갈대밭을 지나고, 다시 갈대의 흔들림에 춤추며 마을을 돈다. 아직 훑고 지나온 풀뿌리의 향기를 안고 있지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무처럼 풀처럼 또 다른 기억이 되어 물줄기를 지난다. 갈대를 만나면 산 그림자가 희미해지고, 마을을 돌면 다시 갈대가 희미해진다. 아마 이 작은 마을의 향기도 넓은 강에 이르면, 지금은 알 수 없는 새로운 풍경에 밀려 흔들리다 사라지겠지.
나 또한 흘러간다. 시간에 밀려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먼 어느 날을 향해. 나는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 보며, 더러 그리워하고, 더러 잊으며, 바쁘게 간다. 그러나 개울물처럼 나도 모른다, 왜 그렇게 가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려는 의도도 없이 그날그날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다. 흐르는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돌 틈을 돌고 풀뿌리를 넘으며 흘러가는 물에선 무엇인가가 살고 있다. 물고기도 말풀도 다슬기도, 무수한 생명들이 얼음 녹는 강 밑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흘러만 가는 그 물속에서 말이다. 흐른다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를 살게 하고 있었던 것일까?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들이 지나간 것들의 기억을 넘어 물속을 헤엄치며 다니고 있다. 제대로 머물러 본 적도 없는 그 물줄기 사이를.
 
내 잊혀져 가는 기억을 담은 마음속에서도 무엇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내 속에도 생명이 있는 물고기들이, 다슬기가, 물방개가, 말풀 사이와 돌 틈을 헤엄치고 있을까? 쉴 새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숱하게 지나가는 잊혀진 기억들은 무엇이 되어 살고 있는지. 부디 잊어버린 기억들이 시간의 개울 속, 어느 맑은 물에서 살아 움직이길 소망해 본다. 겨울비 온 후 개울물을 들여다보니 어쩌면 부질없는 욕심일지라도 그런 소망하나 품어 보고 싶다. 나를 지나간 어느 거친 시간도, 어느 행복했던 순간도, 세월 저 편에서 작은 물고기로 헤엄치고 있는 아련한 그림을 떠올리면서. 한때 내 삶을 요동치게 했을지도 모를 잊혀진 먼 기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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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샘 2017-05-13 12:57:06
염혜순님의 글을 읽으며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됩니다.바쁜 생활 잠시 늦추고 행복했던 그 시절에
미소가 지어지고 힘이 납니다

욤욤 2017-05-13 17:52:22
정신없이 '지금'을 보내느라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생각하기도 어려운 요즘.. 그래도 지나보면 시간이, 또 삶이 흘러가 있고 그만큼 잘 살아 왔구나, 살고 있구나 느끼게 되네요. 잠시 숨고르고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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