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섭의 목화솜 모정]흙이 살아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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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의 목화솜 모정]흙이 살아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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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1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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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도회지의 봄은 여인들의 옷을 따라 찾아온다. 옷이 봄을 데리고 오는지 모르겠다. 농촌의 봄은 경운기 트랙터의 둔탁한 기계음에 실려 온다.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아침잠을 깨우며 논밭을 누비는 농부들은 거름을 내고 논밭을 갈아 농사를 시작 한다. 터진 둑을 보강하고 못자리 준비에 한창일 때 우리 내외의 봄 농사도 서서히 준비운동에 들어선다. 겨우내 황량한 들판으로 남아 있던 흙이 생기를 되찾고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마음이 바빠진다. 이른 봄부터 땅과 흙은 넓고 속 깊은 어머니의 품이 되어 사람들이 하는 일을 기꺼이 도와주고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물을 안겨줄 것이다. 논농사는 막내 동생이 맡아 지으니 우리는 겨우 집터에 달린 밭이 농사의 전부다. 우리 내외의 농사는 두서도 없고 계획도 없이 남 따라, 남 시키는 대로 심고, 풀 뽑고, 거름 주고 때 되면 거두는 것이니 농사랄 것도 못 된다.

막내 동생이 제 일을 끝내고 집 앞 텃밭을 갈아주면 우리의 오밀조밀한 호미농사가 시작 된다. 농사라는 게 자연의 섭리와 사람의 얄팍한 기술이 합쳐 만들어 내는 창조물이다. 농부는 거기에 정성된 마음을 더한다. 순수하고 소박한 농부의 마음, 남을 헐뜯지 않고 해코지하지 않는 선량한 마음이 농사일에 녹아들면 자연은 자연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도 여러 해 자연과 지내다 보니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느끼게 되고 거역할 수없는 자연의 힘을 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연의 힘과 생각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자기 욕심대로 자기 멋대로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무시한다. 자연과의 불협화로 입은 상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 그들은 올 농사를 망쳤다고 자괴하지만 때 늦은 후회일 뿐이다.

지난 해 가을 아내는 무척 바빴다. 여주시 복지관에서 취미로 배운 라인댄스 실력이 눈에 띠게 발전하자 20여 명이 팀을 구성하여 천안, 화순, 일산, 서울, 안산, 수원 등 전국을 돌며 대회에 나가 대상, 최우수상을 휩쓸었다. 콩, 팥, 들깨를 거두어들이고 마늘을 심고 김장을 하고 시제를 모실 때까지, 연습하랴 출전하랴 농사일 하랴 몸이 열이라도 모자랐다. 몸이 고단하니 내년부터는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심각한 수준으로 결심을 이야기하곤 했다.

농사일이 쉬운 건 아니다. 농기구, 비닐, 비료, 씨앗을 장만하고, 작물에 따라 거름을 내고 밭을 간다. 비닐을 씌우고 씨앗을 넣거나, 모종을 준비할 때는 포트에 상토를 담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온도를 맞춘다. 울긋불긋 개량지붕에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고 봄 아지랑이가 너울대면 농부들의 일손이 바빠진다. 농사가 크건 작건 규모의 차이일 뿐 잔손이 가기는 똑같다. 이때쯤 아내도 신이난다. 남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이웃에서 작물 심는 걸 곁눈질하며 아내의 손도 빨라진다. 규모도 작고 여러 가지를 심다보니 전략이나 전술도 필요치 않은, 애기들 소꿉장난 같은 농사, 절대로 아무것도 심지 않겠다는 지난 가을의 결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씨앗 챙기기에 나서 이것저것 주섬주섬 끄집어낸다.

콩 팥만 해도 그 종류가 열 가지를 넘는다. 메주콩, 검은콩, 쥐눈이콩, 완두콩, 강낭콩, 동부, 청태, 서리태, 황태, 녹두, 붉은팥, 검은팥, 흰팥, 푸른팥, 이것이 작년에 우리 내외가 지은 콩 팥인데 여기에 땅콩, 들깨, 참깨, 호박, 시금치, 쑥갓, 토마토, 참외, 수박, 얼가리, 알타리, 상추를 더해야 한다. 이중 몇 가지는 시장에 나가 모종을 사와야 하지만 농사꾼으로서의 노고는 마찬가지다.

평화로운 시골 논밭에 새싹이 돋아나고 복숭아, 살구, 벚꽃이 멍울을 트면 바로 동양화가 된다. 봄나물을 캐던 여인의 모습, 진달래를 한 움큼 꺾어 지게에 매달고 귀가하던 평화로움도 옛말인가, 이제는 그런 정겨운 모습은 보기 어렵다. 농사가 시작되면 뒤 이어 잡초와의 전쟁이 시작이다. 일주일 전 손가락 마디만큼 자란 밭의 잡풀들, 제 깐 놈이 얼마나 자랄 라고, 기다렸다가 좀 더 크면 뽑던지 묻던지 결딴을 내야지, 방심한 틈을 타고 발등을 덮을 만큼 자랐다. 잡초에게는 살아남아야 할 절실함이 있나보다. 잡초는 주인인 곡식보다 항상 질기고 차지고 약삭빠르다. 아무리 귀하고 예뻐도 농부에게는 웬수같은 잡초일 뿐인데 본분도 모르고 잘도 자란다. 물론, 우리 내외도 매번 잡초에게 지고 만다.

농사일이 과학화 되고 기계화되고 대량생산체제로 바뀌고 품종이 개량되고 유통구조가 개선되어 농촌의 모습이 옛날과 다르다. 먹고 살기 바쁘던 이전과 달리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기업화하는 농가가 생기고 생산과 가공, 판매를 일원화하여 노임을 줄이고 소득을 올려 농가 수입을 높인다. 더구나 무역이 발달하고 운송이 빠르다 보니 먼 나라 과일이며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농부는 문명의 계승자이며 문화의 창조가 되어 무궁무진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간다. 농사일이 힘들고 여유가 없지만, 스포츠맨들이 고생을 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농부의 마음은 평안하다. FTA로 농민의 시름이 커지고 있으니 나라의 지도자와 관계자들이 머리를 짜내야 할 일이다. 이것도 농사일이다.

나는 초보 농부의 조수가 되어 아내의 핀잔과 지시를 받으며 농사를 거든다. 친환경농업이 대세이다 보니 이제는 비료, 농약, 제초제를 덜 쓴다. 까마득한 산더미처럼 쌓였던 옛날 퇴비더미가 되 살아 날 일도 머지않았다. 구비(廐肥-동물의 배설물로 만든 비료)공장이 곳곳에 있고 농협에서 지원하여 싼 가격으로 공급되고 있으니 좋은 세상이다.

봄새들이 짝을 찾아 날고, 들판이 푸르게 바뀌고 밭에 일찍 심은 채소들이 몰라보게 자라면 벌써 봄은 성큼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소리 없이 조용히 대지를 적시던 어젯밤의 봄비가 그칠 때쯤 봄은 저만치 가고 있다.

새벽부터 밤까지 애쓰는 농촌식구들, 내일이면 부자가 되고 몸과 마음이 편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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