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정(情)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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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정(情)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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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1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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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텅 비던 야간열차 좌석표가 동이 나서, 입석으로 기차를 탔다. 행여 빈 좌석이라도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게 치사하고, 양보하는 자리도 부담스러워 객차 안에 들어설 생각도 없다. 객차 사이 승강대에 서서 승객들 눈총마저 거북해 책을 읽는다. 아니 읽는 척한다. 이렇게 1시간 이상 서서 여행한다는 것도 만만찮다.

지난 해, 어느 학교 수학여행 중, 서울에서 경주까지 인솔교사가 꼬박 서서 갔다는 기사가 매스컴을 탔다. 기가 막혀 고등학교 국어 교사 박 선생을 보면 놀린다. “그런 선생이라면, 나는 안 해” 하면, “누가 아니래요. 한두 놈 두드려 패서라도 자리를 차지하고 가던지.” 생각 없이 오고 간 말이지만, 덜 떨어진 선생이나 돼먹지 않은 학생들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대쪽같은 선생이 학생들 자리를 탐하겠는가. 학생들 또한 세속오계에서 삼강오륜, 군사부일체의 정신이 맥맥히 흐르는 동방예의지국 후손이니 도덕에 관한 한 청맹과니가 아니다.

따져보자, 학생들의 생각은 서울서 경주까지 거리가 얼마냐. 선생에게 내 자리 양보하면, 내가 다리 아플 때 반환해 주리란 보장도 없고, 내가 양보하면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교대해 주리라 기대할 수도 없으며, 좌석은 각자 돈 주고 산 자리이니 도덕이나 미풍양속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

선생의 입장은 이렇다. 수학여행에 꼭 따라가야 하는 법도 없다. 선생도 경제인이다. 항간에 나도는 촌지로 황폐화된 교권이지만, 정직한 봉급으로 알뜰하고 떳떳하게 자식들 키우며 살고 싶다. 박봉 쪼개 기차표 사들고 내키지 않는 여행으로 짧은 내 인생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인솔은 용역으로도 할 수 있지 않느냐. 꼭 담임교사의 의무라면 좌석권 정도는 해결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학교 측 말씀. 수학여행 인솔은 당연히 담임선생의 일이고, 기차표야 알아서 해결할 문제가 아닐까.

철도청은 이렇게 말한다. 일정 좌석 이상을 구매할 경우 몇 개의 여분의 좌석이 있다. 과거 인솔자라든가 특별석이란 명목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수요자 원칙이다. 인솔자니 특별회원이니 하던 인정이랄까, 특수명목으로 고위직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분으로 생기는 비용도 소비자 각자의 감산 비용으로 계산된다. 따라서 인솔 교사의 좌석권이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선생은 입석권도 없는 무임승차일지도 모른다.

정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 학생이 양보하든, 철도청에서 한 장 여분으로 만들든, 학교 측에서 1등석 하나 준비하든가, 학부모 측에서 좌석을 만들어 드리든가…. 이 별 볼 일 없는 좌석 하나로 전 국토가 흔들렸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남을 생각하고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씨, 인심이 사라지고 있다. 콩 한 톨이라도 나누어 먹던 정, 어려운 일 서로 돕던 두레나 길쌈, 십시일반의 부조, 불편해도 불법, 탈법, 눈감아 주던 인정이 싹둑 잘려나간 기분이다.

울안 쓰레기 태우다 사진 찍혀 고발 당하고, 공중 화장실에서 담배를 태우거나 거리에서 휴지 한 장 잘못버려 벌금 무는 세상이다. 생활이 기계화, 과학화하니 생각마저 감성적 정에서, 이분법적 이성의 서구 패턴으로 변하는 모양이다.

인정은 뇌물 공여를 위한 구실로 추락한다. 구정이나 추석, 생일, 경조사, 곳곳에서 권력의 끄나풀이라도 보이면 정으로 포장된 뇌물이 밀물같이 몰려든다. 독야청청 몽땅 돌려주거나 안 받는 방법도 있겠지만, 물질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인척, 고고한 척하다 왕따 당해 얻어먹지도 못하고 망신만 당하는 수도 있는 법이라, 이판사판 막가기로 작정한다. 뒤집어 보면, 받은 사람도 할 말은 있다. “누가 달라고 했냐.”

인정의 확장, 또는 타락 - 주는 것도 사양하던 자가 뭘 믿고 당당해졌는지, 주는대로 받는 게 아니라 내놓으라고 떵떵거렸으니, 공격형 뇌물 사주(使嗾)라고나 할까. 촌지 명목으로 편지 봉투에서 서류 봉투로 사과상자…. 크고 막강한 검은 돈 포장지로서의 인정(人情). 인정으로 시작한 주고받기가 대선(大選)에서 폭발하니, 한 편은 누가 더 먹고 덜 먹었나 따지는 철면피요, 또 한 편은 평생 번 돈 정치판에 쏟아 붓고 목숨 끊거나 죽도록 매 맞는 꼴이다.

정치인은 서울에서 경주까지 서서 갈 줄 아는 가난한 선생의 자존심을, 기업인은 도덕 명목의 인정보다 보편타당에 바탕을 둔 이성에 따라 자기주장을 편, 학생들을 본받을 일이다. 정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기차가 종착역에 들어서고 있다. 입석 1시간 여행이 끝나는데, 읽던 책은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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