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봄의 전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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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봄의 전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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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1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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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촉촉이 내리던 봄비가 깡마른 앞밭을 적셔주더니 이른 아침 산뜻함을 가져다준다.

바깥 마루 먼지를 쓸어내고 턱에 걸터앉아 봄의 잔칫상을 내려다본다. 뜰 돌과 마당사이 비좁은 틈을 비집고 몇 해째 목숨을 이어오고 있는 민들레. 한 송이가 두 송이, 네 송이로 늘어나더니 무더기를 이루어 일렬종대로 줄을 이었다.

탁구공만한 민들레 꽃씨송이가 경쟁하듯 하얗게 피어났다. 조그만 바람에도 꽃씨를 퍼뜨려 종족보존의 의무를 다 한다. 어느 곳이나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잘 자라지만 예전에는 그러려니, 관심을 두지 않다가 너무 가까이 있으니 자꾸만 눈길이 간다. 줄기는 없고 잎이 뿌리에서 뭉쳐나며 옆으로 퍼진 것이 소쿠리를 엎어 놓은 것처럼 소복하다. 꽃말은 행복, 감사하는 마음이라지만 꽃이 너무 연약하고 초라하여 가난한 여인의 마음을 훔쳐보는 것 같아 측은하다.

자연은 전쟁터다.

흰 민들레는 한약재(포공영)로 쓰이며, 몸에 좋다고 몇 년 전 방송을 탄 후 서울 부인네들이 들판을 뒤져 싹쓸이를 해버렸다. 민들레들은 또 그들대로 꽃씨를 멀리, 가까이 날리며 싹을 틔워 도시 여인들 횡포에 저항한다. 이 역시 자연의 섭리인가. 몇 년 지나다 보니 서울 여인들 출입도 뜸해지고 억척스레 꽃씨를 날린 노력으로 봄 들판을 노랗게 물 들였다.

어느날 이른 아침, 분합문 밖으로 어른거리며 날아다니는 새가 있다. 참새가 먹이 찾아 왔겠지. 생각도 못했는데 어! 제비가 왔다. 삼월 삼짇날도 훨씬 지나고 오더니, 올해는 왜 이렇게 빨리 왔느냐. 반가운 마음에 소리 내어 물어 본다. 작년에 입은 은혜를 갚으려고 박 씨를 가져왔나? 작년 여름, 제비 둥지에서 새끼 한 마리가 제 잘못으로 굴러 떨어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른 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다치진 않았다. 발톱으로 손바닥을 꽉 물고 고개를 숙인 그 녀석을 집에다 올려놓았는데 건강에 이상이 없이 잘 자라 여름을 잘 났다. 흥부같이 선행을 베푼 건 아니지만 놀부 같은 심보는 아니었으니... 엄마제비야! 애들 관리에 신경 쓰거라.

세 마리가 왔던 작년 같이 올해도 이상스럽게 세 마리가 왔다. 날렵한 몸짓으로 마당을 가르며 지형지물을 눈에 익히는 모양인데, 얼마 안 있어 그전에 지은 집들을 둘러보며 살 집을 고른다. 며칠 후 네 마리로 짝을 맞추더니 한 쌍은 안채에 새로 집을 짓기 시작하고 한 쌍은 행랑채 대문 대들보에 있던 오래된 집을 증축하면서 살림을 차렸다. 세 쌍으로 불어나더니 새끼를 잘 낳아 기르고 있다. 제비집 밑에다 판자를 대어 제비 대소변처리를 도와준다. 여름 잘 보내며 가을, 강남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제비와 내가 친해지고 그들을 보호하는 일이 남았다.

제비는 부지런하다. 꼭두새벽부터 어두워 질 때까지 쉼 없이 움직인다. 가끔 전선줄에 모여 앉아 먹잇감에 관한 정보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그것도 잠시, 바로 창공을 가르며 멀리 사라진다.

우리 시골에 올 봄에도 제비는 몇 마리 안 왔다. 먹을거리 부족과 환경 탓이겠지. 제비 잘사는 나라가 되어 옛날같이 새까맣게 하늘을 덮은 제비를 보고 싶다.

제비는 억울하다. 여인을 꾀어 바람피우는 남자들에게 제비족이라는 이름을 붙여 제비의 명예를 어지럽히고, 잘 만들어진 예복에 하필 연미복이라는 이름을 달아 제비를 멋이나 내는 한량으로 치부하게 한다.

올 봄에는 비가 조금씩 자주 내린다. 봄비는 오는 둥 마는 둥 소리가 없다. 빗줄기도 너무 가늘어서 얼굴을 하늘로 올리거나 손바닥을 펴서 빗물을 받아 봐야 알 수가 있을 정도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라던데 어제부터 오늘까지 곡우비가 적당히 내려 대지를 적셔 주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아내는 손길이 바쁘다. 어느 것을 어디에 심을 것인가, 새로 심을 씨앗 고르기부터 거름내기, 사와야 하는 모종의 종류와 대략적인 숫자 파악까지 올 농사의 계획을 마무리 한다. 짙은 분홍색 우산을 쓰고 목 짧은 장화를 신은 아내가 곡우비를 맞으며 이것저것 둘러본다.

덜 자란 마늘 싹을 살펴보고 이제 막 움이 트는 감자와 완두콩도 살펴본다. 대자연의 섭리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받으며, 아내는 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좁은 텃밭은 아내의 재단에 따라 콩, 고구마, 참깨, 땅콩, 쪽파, 부추, 시금치 등 채소밭으로 나뉘었고, 많이 심고 최고로 잘 키우려고 한다. 소꿉장난 같은 서투른 농사지만 아내의 절실함이 담겨 있다. 작년에 재미를 본, 참외와 수박은 숫자를 늘려 열다섯 포기나 사왔다. 여름방학이 되면 손녀와 손자에게 먹일 거리다. 옥수수도 지난해보다 스무 포기는 더 심었다. 키 작은 수수씨도 넣었다. 나도 덩달아 바쁘다. 아내의 지시를 따라 연장을 챙기고 비료를 옮기고 구덩이를 파고 물을 주고 봄을 심는다. 돈으로 계산할 수없는 진정이 깃든 수확을 기다리며 땀을 흘린다. 오래 전 이런 일을 하셨을 할머니, 어머니의 땀과 한숨을 밭에서 찾으며 영글어 가는 봄을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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