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눈에 갇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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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눈에 갇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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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1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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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컴퓨터를 켜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순간 모니터의 화면이 깜깜해진다. 그 1초 동안 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느낌이다. 곧 환한 화면이 떠오를 것을 알면서도 매번 컴퓨터 앞에 앉을 때마다 부딪치는 현상이다. 이 세상에 혼자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나 보다.

우리 집은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꼼짝을 못하는 경사진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눈이 많이 오면, 멀리 있는 국도에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것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세상과 단절된 고독감을 문득 느낀다.

눈이 내린다. 싸락눈으로 시작하더니 이제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진다. 난롯불 앞에 앉아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며 눈이 쏟아지는 풍경을 보는 것이 마냥 즐겁다. 논과 밭, 산, 온천지가 금방 흰 세계로 변하는 모습이 경이롭다. 눈은 삶의 한 순간을 즐겁게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상징이며, 세상을 깨끗하게 변화시키고, 사람의 마음도 순화 시켜주는 신비한 결정체이기도 하다.

금년에는 눈 구경을 별로 못했는데 기상청에서 예고한 대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고 있다. 3월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100년 만의 일이란다. 꼼짝도 못하고 집안에만 갇혀 있는 날이 계속 된다 해도 걱정은 뒷전이고 눈 오는 것만 좋으니 아직도 마음은 동심이다. 서울과 온도 차이가 5~8도가 나는 산골이니 눈이 와도 잘 녹지를 않아서 별천지에 있는 것 같다.

밤새 내린 눈이 거의 20㎝나 된다. 온통 흰 세계다. 눈만 오면 꼼짝을 못하는 곳이라 눈이 오는 것이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세상과 유일한 연결고리인 차가 다니지 않아 눈 덮인 세계는 막막하다. 눈 덮인 산야가 그렇게 아름답지만 떠들썩하게 눈싸움하는 아이들이나 좋아서 꼬리치며 눈밭을 뒹구는 강아지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아 사방이 침묵에 잠긴 듯 고요해서 더 적막하다.

전국에 엄청난 눈 피해로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지고 큰 나무들이 쓰러지고, 길이 막히고, 집도 여러 채 무너졌으며, 고속도로에서 차가 20여 시간씩 갇혀 고생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깨끗하게 보이는 눈 속에 그런 무서운 힘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미국 동북부의 눈 많은 고장에서 두 해 겨울을 보낸 적이 있다. 11월부터 4월까지 눈 속에서 살았다. 미국의 유명한 5대 호수를 끼고 있어 ‘호수효과’ 탓이라 한다. 길 양쪽으로 쌓아놓은 눈이 사람 키를 넘게 많이 왔다. 평생 동안 구경할 눈을 그때 다 한 것 같다. 눈 때문에 군대까지 동원되고, 눈 치우는 비용으로 시의 재정이 바닥났다는 얘기도 들었다. 눈이 많은 고장에서 지낸 두 번의 겨울은 우리나라가 아니어서인지 재미있었고 행복했다.

우리나라는 눈이 조금만 와도 교통 대란이 일어나고 사고도 많이 나며, 눈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이 많지만 그곳은 땅이 평평해서인지 눈의 고장인데도 체인도 없이 차들이 잘도 다녔다. 체인을 하는 것을 길이 망가진다고 당국의 정책으로 금한다고 한다. 눈이 많이 오면 지붕에 올라가 눈을 치우는 구경도 했고,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지붕이 무너진 집이 간간이 눈에 뜨이기도 했다.

그곳은 미국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어 눈이 많이 내릴 때는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어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구경할 수 없는 날이 며칠씩 계속되었다. 겨울에는 눈 때문에 며칠 씩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예사인 이 눈의 고장에는 ‘오두막집에 갇혀서 느끼는 공포’라는 뜻의 ‘cabin fear’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눈이 많다.

눈에 덮인 천지가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데도 세상을 바라보면 텅 빈 듯한 느낌도 함께 받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잠시라도 세상과 고리를 끊고, 일상을 멀리 해 놓고 관조해 보며 삶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를 가져 보라는 뜻일까. 눈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가슴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의미의 생각들이 심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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