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 칼럼]쌀독에 채우지 못하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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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칼럼]쌀독에 채우지 못하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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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2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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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민원서류 발급 관계로 동사무소에 잠시 들렸다. 곧장 민원실 문을 열고 출입을 하려는 찰나에 종전에 보지 못했던 독 항아리가 눈에 띄었다.

관청에 웬 독 항아리 인가 싶어 호기심에 다가갔더니 사랑의 쌀독이라는 문구와 함께 어려운 사람은 얼마든지 퍼가십시오 라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제야 그 독 항아리가 쌀을 가득 담아 놓은 쌀독임을 깨닫고 어려운 이웃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하는 관청의 훈훈한 마음과 온정에 고개가 숙여졌고 아이디어가 빛나 보였다.

쌀을 생산하기까지는 농부들의 피땀 어린 각고의 노력이 뒤따른다. 이른 봄에 볍씨를 파종하여 못자리에서 자란 어린 모가 논으로 옮겨져 심어지기까지의 과정도 힘든 작업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시비와 물관리 병충해 방제 등 어려운 논 관리를 철저히 해야만 풍년농사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전국 어디서나 기계영농과 자동화 시 설로인 하여 벼의 수확과 도정이 과거에 비해 신속해졌고 쌀의 품질도 높아져서 지방 자치단체마다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유명상품으로 각인시키고자 쌀 포장지마다 디자인을 색다르게 차별화하여 홍보하고 판매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볼 때 쌀 소비는 식생활 개선과 외식 문화로 인해 쌀이 남아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오직 쌀에 목숨 걸었던 예전에는 생산된 쌀은 자녀들의 학비조달과 영농 부채를 갚는데 먼저 쓰였고 그 나머지는 한해의 식량으로 긴히 사용되었다.

쌀을 오랫동안 곡간에 보관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잣집들이었고 서민들은 잠자리도 비좁은 작은방의 윗목에 쌀을 보관하며 동거생활을 해야 하는 이중고의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쌀을 보관함에 있어서도 부잣집으로 소문난 집에서는 뒤주를 사용하여 쌀벌레와 곰팡이가 쏠지 않도록 관리를 했지만 능력이 없는 서민들은 옹기로 만든 독을 쌀독으로 선호하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벼를 수확하는 가을로 접어들면 쌀 생산량에 따라 고대광실 양반집 문턱처럼 높아 보이는 부잣집과 죽도 못 먹을 어려운 처지의 실정을 알리는데도 쌀이 대신했다.

언제나 돈푼 있는 사람들과 부농의 집안은 뒤주와 쌀독에 꽃이 피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집안의 쌀독은 쌀보다는 근심과 걱정이 더 채워졌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삶의 현장이었다 지난 시절이 되었지만 어릴 적 보낸 삶의 고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새겨져 보기보다는 왠지 애환이 서렸던 고생담으로 떠오른다.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봉급은 쌀독을 풍족하게 채울 수 없었고 밥만 먹고사는 열식 구의 쌀 소비량은 매번 부족하기만 했다.

때 되어 독에서 쌀을 퍼내는 어머니의 양푼 그릇 소리는 쌀이 떨어진 독 항아리의 밑바닥을 끍어내는 금속성 소리였으나 가난에 쪼달려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어머니의 처절한 비명 소리였다.

이미 바닥을 내보인 독 안에서 한 톨의 쌀알이라도 더 건져내어 굶주린 자식들의 배를 채워주려는 어머니의 절박한 손놀림은 가난한 삶을 원망 하기보다는 눈앞의 끼니를 더 걱정해야 하는 고통의 몸부림 이기도 하셨다.

삶에 쫓긴 어머니의 일상 소원은 쌀독에 쌀이 가득 차기를 기도하셨지만 웬일인지 우리 집 쌀독의 쌀은 밑바닥에서만 맴돌 뿐 어머니의 꿈같은 소원을 호락호락 들어주지 않았다.

원수같이 힘든 세월이 지나가자 서구식 음식문화의 패턴과 식생활 개선으로 쌀은 그 옛날처럼 많은 분량이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쌀을 보관하는 용기도 작아졌다 80킬로 한가마를 담아뒀던 뒤주와 쌀독은 20킬로 한 포대를 담아두는 오동나무 용기와 생활 도자기로 변했고 단골 쌀가게와 재래식 5일장에만 거래되어 사기가 힘들었던 쌀은 장소 구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도록 마트와 상가에 산처럼 쌓여있다.

요즈음 외식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쌀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한 가마니의 쌀은 단출한 가정의 몇 달치 식량으로 사용되고도 남아도는 실정이 되었다. 쌀은 식량 이외에도 부와 행복으로 표시되고 역술가는 주술용으로 사용하여 점괘를 본다. 쌀독에 쌀이 떨어질 때쯤 되어 쌀을 사서 쌀독에 가득 채우는 날은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입가에서 행복한 웃음이 넘쳐난다. 그런 아내의 웃음을 보다 보면 쌀독에 쌀이 가득 채워지는 행복을 그리워하시다 세상을 뜨신 어머니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중압감 때문에 쌀독의 뚜껑을 곧바로 닫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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