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섭의 목화솜 모정]겨울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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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의 목화솜 모정]겨울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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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1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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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올 여름, 무던히도 덥던 몇 달을 보내니 시간이 약이라 10월 추석과 추분을 지나고 아침저녁 서늘하다.

사랑채 바깥마루에 걸터앉아 머그잔에 가득 채운 검은 커피를 마시며 눈앞에 펼쳐진 나의 농사성적표를 가늠해 본다. 애잔한 어린 시절의 농촌 풍경화는 퇴색하고 기계 문명이 자리 잡고 있는 지금, 엉터리 초보농군이 흉내를 내고 있다. 내 시골 집 앞과 옆으로 천 평 조금 모자라는 텃밭이 있다. 그 안에 조그마한 시골집이 두 채, 논 한마지기, 이것들을 뺀 나머지가 소위 내 영토인 텃밭인데 400평쯤 될까? 한데 붙어 있는 게 아니고 세 군데로 나뉘어 있다.

올 해도 이른 봄부터 농자재- 비닐, 끈, 호스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지출항목- 제초제와 살충제, 칼슘등 영양제, 각종 비료를 사 들였다. 3월초부터 시작되는 우리 내외의 농사는 경중완급이 무시되기 일쑤이고 꼭 해야 할 일, 하나마나한 일, 안 해도 되는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 초보 농사꾼의 티를 낸다. 남의 농사를 곁눈질로 따라가며 씨 뿌리고 잡초 뽑고 비료 주고 모종을 이앙하다보니 다른 집보다 며칠씩 늦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 나와 내 자식들이 먹을 거라고 농약과 비료를 덜 주다보니 수확은 항상 꼴찌다.

가끔 TV에서 보는 농부들의 성공담에 감동을 받지만 그들을 따라 농사를 키우거나 작목을 바꾸기에는 나이 많고, 돈이 모자라고 경험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체념한다.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농부의 마음이란 걸 잘 알면서도 게으름을 피운다.

비닐하우스에 고추를 심는다고 거름을 넣고 밭갈이를 하며 우리 내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년부터는 고추를 심지 말자고 다짐한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모종을 내고 풀 뽑고 진딧물과 싸우고 나방퇴치에 아침저녁 하우스 비닐 문 여닫이에 신경을 써야 하고 물주기도 빠뜨리면 큰 일 난다. 겨우 고추 100포기 심는 걸 농사라고... 노력에 비해 소득이 영 아니다. 고추 옆에다 쪽파, 토마토, 오이도 몇 포기 심어 먹을거리를 해결한다. 조그마한 농사의 재미를 느낀다.

해마다 심어보고 실패하면 다음해에는 포기하든지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남 따라 매 달린다. 올 해도 수박 다섯 포기, 참외 열 포기, 옥수수 150 포기쯤을 세 번에 나누어 심고, 땅콩, 참깨, 10여 가지가 넘는 팥, 콩, 녹두를 심었다. 아 또 있다. 호박도 종류 따라 몇 포기씩 심는다. 그리고 늦가을, 김장을 하고, 마지막으로 마늘을 심고 시제를 모시면 올해 농사는 끝이다. 규모가 큰 논과 밭은 동생이 맡고, 일부는 세를 주었으니 망정이지 모두 내가 맡아 농사를 짓는다면? 머리에 쥐가 난다.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쓴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내가 겹쳐 보여 자신이 안쓰럽다.

농사일은 하늘과 땅, 사람과 작물이 4위 일체가 돼야 비로소 성과를 얻는다. 넷 중 하나라도 삐끗하면 그 농사는 끝이다. 올 여름 비도 질척거리고 땡볕이 내리 쬐니 모든 작물이 목말라 허덕였다. 이때껏 처음 겪는 더위라 했다. 더위 속에서 열기를 참아냈던 끈질김, 직접 뛰고 겪으며 경험치를 쌓아 온 농부들의 노고.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다. 일기가 불순하여 여름작물은 재미가 없었다. 감자, 고구마, 참깨, 과일 모두 그랬다. 그런데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참깨 말리고 터는데 날이 좋아 힘이 절약 되었으니 우산 장수와 나막신 장수를 둔 어머니의 심정인가. 어린 자식을 키우는 어버이의 마음은 농사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작물들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커 간다지 않는가. 그러니 사람들의 정성이 모자라면 주저앉거나 뒷걸음치며 항의와 시위를 한다. 항상 긴장하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이유다.

몸의 수고보다는 마음고생이 농부들을 더 아프게 한다. 가을의 문턱을 넘으니 이른 벼를 수확한 농부들은 수매를 하는데, 값이 작년만 못 하고 오를 대로 오른 물가가 농부의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문득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앞개울 건너 땅콩 캐는 여인들의 이야기 속에 농사가 덜 되었다는 소리가 들린다. 비닐 씌우고 씨앗 넣고 풀 뽑고 비료 주고 공 들였던 지난 봄 여름의 노고에 댓가를 덜 받았음이겠지.

옛날, 어른들은 벌레가 먹고, 새가 먹고, 나머지를 사람이 먹는 거라며 해충과 해조도 일부로 받아 들였지만 지금, 그렇게 해서는 농사가 아니다.

농부들에게 농사는 영원한 생명이요 가야 할 길이다. 농부들의 길은 항상 땀범벅이다. 농부들은 대박을 꿈도 꾸지 않는다. 그들은 소박에 만족한다. 농부들은 내년 봄이 되면 또 농사일을 시작할 것이다. 마음속에는 더 크고 더 많은, 그리고 더 흡족한 결실을 기대하며 하늘이 시키는 대로 자연이 이끄는 대로 작물의 응석과 트집을 참아내며 또 한 해를 시작할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이제 하늘과 땅이 숨을 고르고 사람과 작물이 조금 쉬어야 할 차례다. 내년 봄이 되면 또 기지개를 켜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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