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땡 땡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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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의 목화솜 모정]땡 땡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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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1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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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어느 화가도 그려낼 수 없을 고운 색깔이 하늘을 덮었다.

마지막 유희를 즐기는 잠자리 떼가 하늘에 무늬를 새기며 어지러이 날아다니고, 잠자리를 쫓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은 여러 가지가 다르다. 하늘과 들판의 색깔이 다르고 나무와 풀의 색깔이 다르고, 얼굴에 스치는 바람의 감각이 다르다. 봄부터 여름을 지나는 동안 기울인 노력의 결실을 거두어들인다는 농부의 포만감이 또한 다르다.

이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자연과 땅과 작물과 사위일체가 되어 땀을 쏟으며 성심을 기울이고, 자연에 맞서고 순응하면서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낫으로 벼를 베고 말리고 다시 거두어 타작을 하고 가마니에 담아 집으로 나르고, 멍석에 다시 말리고, 선풍기에 날려 잡티를 없애고 공판에 넘겨 등급을 받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 불과 몇 십 년. 이제는 콤바인이 벼 베기와 탈곡을 동시에 하여 자동으로 자루에 담고, 농협에 가져가 통에 부으면, 습도, 무게, 벼의 불량률이 컴퓨터로 즉시 점수로 매겨져 전표에 찍혀 나오고, 돈은 통장에 입금되니 도깨비 방망이 같은 세상이다. 누런 들판에서 거두어들이는 벼의 값이 정해지는 건 농부의 몫이 아닌 정부와 농협의 칼끝이어서 대거리 한 번 못하지만, 옛날보다 좋아졌다고 자위한다. 한 달씩이나 걸려 먼지 뒤집어쓰고 힘들이던 조상들 추수 일에 비해 영농이 과학화되고 기계화되고, 그것도 모자라 자동화 되었으니 좋아라 춤을 출 일이지만, 천만의 말씀. 농협, 농약방, 종묘상, 농자재상에 외상값 갚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니 농민은 먹이사슬의 맨 마지막 피해자가 된다. 게다가 FTA로 농사의 재미가 더 없어지니 쳇바퀴 도는 다람쥐 신세다. 농민은 여기저기서 착취만 당하는 불쌍한 존재라고 독백하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남이 비닐하우스를 지으면 나도 따르고, 남이 농약을 주면 나도 준다. 종자나 종묘가 어느 것이 좋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나도 따른다. 안 그럴 수가 없다.

농민들은 순박하다. 우직하다. 농사에 술수가 있을 수도 없지만 있다 손 쳐도 술수를 부릴 줄도 모른다. 그래도 가을이 기다려지는 건 장마와 무더위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낸 성적표가 궁금해서이다.

몇 해 전 우리 집 뒤꼍에 제법 큰 감나무가 있었다. 오랜만에 처음으로 탐스런 감을 주렁주렁 열어주어 무척 고마웠는데, 그것으로 끝, 그 해 겨울, 얼어 죽고 말았다. 몇 번 묘목을 사다 심었지만 우리 마을이 감나무가 잘 안 되는 고장이어서 포기하였다. 그런데 마당 한 귀퉁이 돌 틈을 비집고 감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어 의아하다. 아마도 먹고 버린 감 씨가 우연히 싹을 틔우고 혼자 자란 것 일게다. 작년에 감이 다섯 개가 달렸다. 아기 주먹만 하다. 신기하고 고마워서 까치밥으로 남기니 어느새 까치밥으로 없어졌다. 아기 팔뚝보다도 가늘게 두 갈래로 자라고 있는감나무에 이른 봄 비료를 주고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매일 쳐다보며 즐거웠다. 5월 달 들어 감꽃이 피었는데 청사초롱을 압축한 것 같은 올망졸망한 망울이 수 백 개가 넘게 매달려 있다. 저것들이 모두 크면 가지가 부러지고 말텐데... 걱정이 태산이다. 연약한 가지에 제 무게도 감당하지 못 할 정도로 많으니 적과를 하든지 받침대를 마련하든지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

탐스럽게 달린 감이 가을의 절정을 알린다. 빼곡하게 달린 감은 잘 버티고 있다. 감은 철이 이르다. 일찍 잎을 떨어트려 감이 잘 익도록 배려하고 황금빛 감이 주황색으로, 진홍색으로 변하며 우리에게 눈요기를 시켜준다. 감은 작년같이 아기 주먹보다도 작다. 큰 독에 볏짚을 깔고 차곡차곡 담아 연시가 되면 냉동고에 넣어 얼렸다가 방학 때 내려 온 손녀 손자에게 아이스크림으로 먹일 것이다.

가을은 치열함, 절실함, 정성된 마음, 믿는 마음의 결정체이다. 온 세상이 잠들어 있을 때도 뼈대를 키우고 살을 덧붙이고 기운을 보탠 작물과 자연들이, 결정적일 때, 형형색색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간들 앞에 선다. 올 가을도 어김없이 우리 내외에게 힘들인 만큼의 결실을 가져다주었다. 땅콩, 고구마, 갖가지 콩, 채소, 마늘, 감자, 손바닥만 한 텃밭에서 일구어 낸 보람, 이런 맛에 농사꾼들은 농심을 이어가는가 보다. 농사문화도 세월 따라 세상 따라 완전히 바뀌어 간다. 두레를 짓거나 품앗이로 농사일을 거들던 풍속이 사라졌다. 들판에서 들밥을 먹던 시절이 그립다.

자연과 사람과 농작물이 일구어 낸 환희. 하늘이, 사람이, 작물들이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내일을 기약하는 종소리를 내는 것 같다. 땡. 땡.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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